효도 경로 컴플렉스

By | 2009-07-12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꼭 한번씩 가는 곳에서 꼭 한번씩 하는 일이 있다. 대중목욕탕에 가서 때밀이 (요즘엔 목욕관리사라고 하던가..) 에게 온몸을 맡긴채 때를 밀리는 것이다. 요즘에는 순수하게 목욕만 하는 곳이 드물어졌고 그대신 종합레저센터라고 할 수 있는 찜질방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곳 인천 부평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신도시라고 이름붙은 지역에서는 오리지널 목욕탕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서도 스파24 라는 곳에 가서 찜질방은 안 쓰고 목욕만 하겠다고 하여 약간 싼값으로 목욕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때밀이도 불렀다.

나보다 5분 먼저 다른 손님이 누워서 때를 밀리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조금 늦게 시작을 했는데 어지간해서는 때미는 사람이건 누구하고건 얘기를 나누길 귀찮아하고 또 부담스러워하는 나와는 달리, 내 옆의 그 손님은 때밀이와 쉬지않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대한 대화 내용을 무시한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귀에 들리는 내용이 있었다. 내용인즉, 어떤 큰부자에 대한 얘기를 한참 하는 것이었는데 그 사람이 자식들에게 그 많던 재산 다 줘서 호강시켜줬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 가서 보니 그 아들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 자식들이 못 됐더라… 자식들에게 잘해줘봤자 소용없다…. 라는 얘기였다.

본의 아니게 남 얘기를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저녁에 여자랑 놀아난 얘기도 생각났고, 오래전에 어느 상가에 조문을 갔을 때 멀쩡히 있던 상주가 나를 비롯한 문상객을 맞이할 때는 갑자기 마치 일정한 리듬의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낮은 톤으로 깔았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러고보니 그때 그 상주는 문상객이 고인에게 절할 때에도, 그리고 상주와 맞절을 할 때에도 끊임없이 그 소리를 내어서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었다. 하긴 옛 시절에는 지금의 3일장이 아닌 5일장까지도 치루느라 그처럼 곡을 하는 것이 힘에 부쳤는지 상주 옆에서 대신 곡을 해주는 사람도 돈 주고 사곤 했단다. 프로 곡쟁이라고나 할까. 요즘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어떻게든 곡을 하는 것이 자신들이 부모의 죽음에 대해 그토록 애통해 한다는 증거를 보임으로써 효자 효녀라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생전에 부모에게 어떻게 대했던간에 결국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체면” 유지용의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눈물 한방울 안 흘리더라…고? 졸지에 남의 입에서 나쁜 자식으로 전락해버린 그 아들의 실제 마음가짐은 어떨지 모르겠다. 언젠가 일종의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것으로 “축제”라는 것이 있었다. 한국 남부 지역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초상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고 하는데 난 영화를 일부만 보았지만 그 제목이 맘에 들고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부모가 90세까지 건강히 살다 고생 없이 편히 눈을 감는다면 그건 슬픈 초상일까? 부모가 돌아가시는 일은 어쨌던간에 가슴을 애는 슬픈 일로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반드시 엎드려 곡을 해야하는걸까? 어차피 내가 일반적인 시각의 소유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초상은 행복한 일생을 살다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일종의 “축제”처럼 치뤄야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50 살 먹은 자식더러 80 살 먹은 부모의 죽음을 갖고 애를 끊듯 슬픈 일로 삼으라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그 50살 먹은 자식도 곧 자신의 차례가 되어 자식들에게 자신의 장례를 맡기게 될 것이다. 자식이 백년 천년 살게 되어 부모만 보내기가 너무 슬프다면 이해가 가겠지만 어차피 이승을 뜨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처지에 뭘 그리 슬퍼하란 말인가. 그저 차분히 추모한다는 느낌만 되면 그걸론 부족한 것일까?

말이 나와 말인데 이른바 유교적인 효도 사상, 혹은 경로 사상이란 것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릴 적에 봤던 전래동화인지 뭔지에 이런 글이 있었다. 몇년째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너무 시골 집에 할아버지, 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 세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 자식 내외가 상의하기를 “집에 먹을게 없어서 식구를 줄여야 하는데 자식은 또 나으면 되지면 부모는 한번 잃으면 끝이니 애를 죽입시다”라고 했단다. 그래서 애를 산으로 데려가서 땅에 뭍으려고 흙을 파고 있다가 그 속에서 큰 종이 나와 이걸 나라님에게 바쳤더니 그 효심을 가상히 여겨 곡식을 내려줬다나 뭐라나… 워낙 오래전에 읽었던 이야기라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건지 참 한심한 경로사상이다. 그 아들의 아버지 과연 아들 내외가 그런 잔인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어쩌면 노망이 들어서 그런 눈치도 못 챘을 것임에 틀임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늙은 목숨을 위해 손주가 희생당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을까.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어린 새싹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산에 들어가려고 하는 마음이 들었어야 할 것이다.

생명의 본질과 본능은 자손 번창일진데 그것을 뒤엎는 행위가 권장되어 왔다. 마치 성경에서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효도관과 비슷해 보인다. 이런 효도관을 누가, 왜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히도 비틀어진 심뽀가 아닐 수 없다. 사자는 무리를 지어 살며 오직 한마리의 대장 숫사자만이 그 무리에 존재할 수 있는데 나중에 그 대장이 늙고 병들면 힘좋은 젊은 숫사자가 찾아와 그 대장을 내쫓는다. 무리에서 쫓겨난 대장 숫사자는 결국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늙은 뒤에 구박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있는 어른들이 그런 숫사자의 처지가 되기 싫어서 일부러 만든 사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노인을 공경하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우리들 기성세대를 키웠고 지금의 사회를 구성했고 경제적인 기틀을 세운 분들로서 이제 사회적 약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공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치거나 모든 사람의 동등한 가치를 침해하는 일로 연결되는 것은 곤란하다. 워낙에 남의 흉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부모의 장례때 곡을 하지 않는 것도 큰 흉이 될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당당한 모습이 되는 길은 장례를 얼마나 화려하게 치뤘는지 얼마나 좋은 명당 자리를 찾아 그곳에 모셨는지 얼마나 큰 묘비를 세웠는지같은 것이 아니다. 껍데기 효도가 아닌 알맹이 효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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