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편한 세상이 온 것일까

By | 2000-12-24

어린 시절에 꿈꾸던 미래는 장미빛 환상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읽던 책들 중에도 미래 사회에 대한 장미빛 환상을 보여주던 것들이 많았다. 그 어린 나이에는 조지오웰의 ‘1984’ 같은 소설책을 읽을 나이도 안 됐고,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같이 과학기술은 발전했으면서도 암울해진 미래를 다룬 영화는 별로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깨동무’나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도 눈부시게 발달하게 될 미래 과학을 보여주었고, ‘학생과학’ 처럼 필자에게 과학기술자로의 길을 소개한 잡지에서도 미래는 빛나도록 아름다웠다.

미래… 그날이 오면, 세상의 어렵고 복잡하고 위험한 일들은 모두 기계와 컴퓨터와 로보트에게 맡기고 인간은 좀더 창의적이고 안전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했다.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대면서 살 이유가 없어진다고 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 당시의 인간이 할 일을 아주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있게 해줄테니 세상은 곧 지상낙원처럼 될 것으로 서술됐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그걸 믿었다.

오늘로 시선을 옮기자. 컴퓨터와 자동차, 휴대폰… 세상은 편해졌다. 언제 어디서나 맘대로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고, 자동차는 아무나 몰고 다닌다. 컴퓨터 통신을 통해 지구상의 어디에서나 즉시 원하는 곳과 온라인 상태가 될 수 있다.

필자가 매일 연탄을 갈던 국민학교 시절에는 구경도 못해봤던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같은 것도 지금은 보편화되었다. 덕분에 주부들은 훨씬 많은 여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가정에는 홈오토메이션, 혹은 홈네트워킹 같은 것도 깔리는 첨단 세상이 됐다.

살펴보면 어느 광고 문구처럼 ‘이 편한(e-편한) 세상’이 온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가정에서는 편한 세상을 만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편한 세상이 되면서 남는 여가 시간을 온통 TV 시청이나 컴퓨터 채팅으로 때운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자기의 선택 아래 최소한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아닌가. 하지만 세상은 이상하게도 각박하고 더 여유가 없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왜 일까.

지난 사흘동안 매일 새벽 3시가 조금 넘어가면 꼭 눈을 뜨게 되었다. 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한번 미국 출장을 다녀오면 그 시차로 인한 후유증이 전보다 심해진 듯 하다. 예전 같으면 시간만 확인하고 그냥 잠자리에 누워서 또 잠을 청하겠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회사 네트웍을 접속해 미국 본사에서 온 메일이 있는지 확인부터 한다.

새벽엔 케이블 모뎀의 접속 속도가 빨라서 아주 일하기 좋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업무를 하다 보면 6시경이 되고 잠깐 눈을 붙인 다음에 출근한다. 그래서 회사에선 몸이 괴롭다.

e-편한 세상이 되었지만, 이 세상은 왜 이리 빡빡해졌는지.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된다. 좋은 컴퓨터와 데이터 통신과 휴대폰으로 훨씬 효율이 높아진 것 같은데, 왜 일은 더 많이 해야 하나.

인간은 서로 경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 좋은 방식을 도입해 더 짧은 시간에 경쟁자(혹은 경쟁사)가 하는 만큼의 일을 하게 된다면 그걸로 그치겠는가. 경쟁자보다 훨씬 많은 결과를 내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업무 시간을 줄여선 안된다.

예전 같으면 도로상에서는 별다른 일을 못했겠지만 지금은 휴대폰으로 다음 일이 무엇인지 무엇이 잘 됐고, 잘못 됐고, 또 지금 어느 업체로 가는게 좋은지 등과 같은 식의 일을 한다.

휴가를 맞아 쉬고 있는 사람에게도 휴대폰으로 호출이 가능하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운영체제 덕분에 컴퓨터 화면에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업무 프로그램이 돌아갈 수 있다. 노트북 컴퓨터와 팜탑 컴퓨터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영자는 피고용자들에게 그만큼 일을 더 많이 시킬 수 있게 됐다.

직장에서의 업무 효율은 높아지고 있지만, 어떻게든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들은 나날이 덜 자유로와지는 것 같다. 그저 일중독자들에게만 편한 근무 환경이 된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꿈꾸던 그 과학기술의 르네상스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언제쯤이면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편리하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미래가 올는지. 이른바 ‘경쟁사회’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때가 돼야 그 꿈은 이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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