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형 남자였다

By | 2009-09-12

사용자 삽입 이미지언젠가 혈액형이 그 사람의 성격을 상당 부분 좌우한다는 속설이 스포츠신문인지 여성잡지, 혹은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그것이 거의 당연한 사실처럼 얘기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령 오지랖이 넓은 사람보고는 혈액형이 O형일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에겐 A형을, 이기적이고 고집센 사람은 B형의 혈액형을, 그리고 돌발적인 성향을 가지면 으례 AB 형이 아니겠냐는 식으로  혈액형을 가지고 사람에 대해서 절반은 넘겨짚곤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래서 유머 비슷한 짜장면집 얘기가 나온 것 아니겠는가.

각각 다른 혈액형을 가진 친구들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의 AB형 피를 가진 한 친구가 갑자기 면을 먹다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이른바 싸이코 기질을 가진 AB 형이다. 그러자 소심하기 이를데 없는 A 형 친구는 그게 혹시나 자기도 모르게 뭔가 실수를 해서 AB형 친구가 화가 나서 나가버린게 아닐까하고 괜한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이에 반해 워낙에 오지랖이 넓은 O형 친구는 자신도 짜장면을 먹다말고 AB형 친구를 찾아 위로하여 다시 데리고 들어오려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B형 친구는 남이 튀어나가건, 좌절해 앉아있건, 친구 찾아 밖으로 나가건 상관없이 그저 자기 먹을건 챙겨먹어야지 생각하며 아직도 짜장면을 계속 먹고 앉아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이다. 이게 각 혈액형 별로 단적인 성격을 보여준다는 주장의 얘기이다.

사실 이런 속설이 처음에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재미삼아 하는 농담 수준이었는데 어떤 때는 의외의 상황을 낳는 것 같기도 하다. 아예 ‘B형 남자’라는 영화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남을 흉볼 때도 이용되기도 하다가 혈액형 때문에 아예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이상해지기도 한다. 어쩔 때는 자신의 혈액형이 특정한 타입이니까 난 잘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미리 좌절하기도 하는 것까지 보고나면 정말 지나치다 싶어진다. 부끄럽게도 그게 반드시 남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잘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역시 난 A형이라 우유부단하니까… 라는 식으로 농담으로서 치부했던 경우도 한두번이 아니니 말이다. A형이라 소심하고, 감정이 예민하고, 쉽게 결론을 못내리고, 행동으로 잘 옮기지 못한다는 속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리 속에도 영향을 입히게 된게 아닌가 싶었다.  머리속에선 ‘그런 쓸데없는 얘기란..’이라고 비웃지만, 가슴으로는 사실 그런 혈액형별 성격 비교론을 듣고 나면 정말 잘 들어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으니 말이다.

지난 월요일엔 꽤 여러 해 만에 혈액과 소변의 정밀검사를 해보고 싶어져서 병원에 다녀왔고 어제 그 결과를 받으러 다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의사선생에게서 검사 결과에 대해 청천벽력같은 얘기를 듣고 말았다. 무슨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70 가지가 넘는 모든 검사 항목에서 모두 정상 또는 이상없음으로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바로 내 혈액형이 이제까지 수십년 동안 당연히 그것이라고 알아왔던 A 형이 아니라 바로 B 형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사실은 내가 B형 남자였다고..?

이제까지 사귀던 여자가 사실은 여장남자였다고, 영화 크라잉 게임에서 옷을 벗기다가 그 사실을 발견한 장면이 떠오를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A가 아니고 B라고. 학교때 졸업 자격을 위해 꼭 필요했던 A 학점을 받은 줄로만 알고 안도하고 있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은 B 학점이더라고 했어도 그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의사 선생에게 물었다, 이게 100% 확실한거냐고. 그렇단다. 검사는 자동화 기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실수가 개입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까지 A형이라고 알고 있던 나의 혈액형은 언제 어떻게…? 그것은 초등학교 저학년때 전교생의 귀를 바늘 비슷한 것으로 찔러 피를 내어 검사하여 나온 결과였다. 그 뒤로 여러해 뒤에 읽었던 어느 신문 기사에서도 그 당시 초등생의 혈액형 검사 결과의 20% 이상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도 실제로 읽은 기억이 있다.

중학교때 처음으로 혈액형의 유전에 대해 교과서에서 배운 뒤에 부모님에게 혈액형을 물어보고나서는 의아해하기도 했었다. 도저히 그 두분의 혈액형으론 내가 가졌다고 알고 있던 A형 자식이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또 단순히 내가 뭔가 잘 못 알았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누나와 동생의 혈액형이 둘다 B형인걸 보면서는 어리둥절 했었다. B형 아내와의 사이에 생긴 내 딸과 아들의 혈액형이 모두 엄마와 같은 B형일 때에도 그냥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내게 사실은 B형이었다고 하고있는 것이다. 사실 난 헌혈을 한 적도 없고 수혈을 받은 적도 없어서 따로 혈액형에 대해서 통보받은 적이 없는게 사실이다. 내 혈액형에 대해 대답이 필요할 때며 항상 어릴적에 통보된대로 “A형입니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고 이제와서 알게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느낀 것은 혈액형에 대한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었다. 이제 내가 소심하다고 느껴질 때, 예민하고 우유부단하다고 느껴질 때 난 더 이상 ‘A형 남자라서’라는 식으로 핑계를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혈액형을 가지고 인간의 성격을 가늠하는, 말도 안 되는 유행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일종의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일 뿐이고, 내 판단은 내 판단이고, 나의 어떤 못난 성격이건 기질이건 모두 내 고유의 것일뿐 혈액형 따위에다 대고 핑계를 댈 수는 없어졌음이다. 생각해 보면 혈액형에 대한 편견은, 요즘엔 오히려 ‘인종차별’보다 더 훨씬 더 심한 차별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싶기까지 하다. 이제 나는 이제 그런 속설에 대해 하이킥을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내 혈액형이 사실은 B형이었다고 알게된 뒤에 그것이  벌써 내 머리속에 영향을 줬는지 잠깐 동안은 내 성격이 마치 B형 남자의 특성이라는 속설 내용과 맞아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고개를 흔들어서 이따위 생각들을 모두 다 털어버려야 한다. 혈액형이 인간의 성격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적으론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분명히 상호관련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무척이나 변화무쌍한 운명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존재인데 고작 혈액형에 따른 성격이라는 일종의 ‘미신’스러운 이론을 가지고 그 가치와 존엄성과 가늠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도 안 될 일이다.

인생에 있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녀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키도 다르고 체중도 성격도 모두 다르다. 혈액형도 단지 그런 개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절대로 그걸 가지고 미리 나를 가늠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것은 나를 어느 제한된 영역에 가둬놓고 미래에 대해 제한을 두는 요인이 될 뿐이다. 나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혈액형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어제까지는 A형 남자였지만, 더 이상 A형 남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부터 이른바 ‘B형 남자’가 된 것은 아니다. 혈액형은 단지 수혈받거나 헌혈을 하는 것과 같은 제한된 경우에서만 기억해 내면 된다. 난 앞으로도 계속 혈액형이 B 타입일 뿐이지 ‘B형 남자’로 규정 지어지진 않겠다. 키와 나이와 체중과 언어와 인종과 그밖의 모든 것들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난 바로 ‘나’라는 인간이니까.

One thought on “나는 A형 남자였다

  1. guybrush

    “난 A형이니까 이렇구나.”라고 하다보니까 정말 그렇게 되는군요. 일종의 자기최면인 셈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B형이었다는 반전은 정말 재밌네요. 성격은 우리 스스로가 가꾸어가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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