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P 파일을 그대로 두어라

By | 2003-06-02

1990년대 초, 1200bps나 2400bps 모뎀으로 PC 통신을 하던 그 시절에 파일을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는 것은 여간 골치아픈 일이 아니었다. 느린 속도의 모뎀으로 하루종일 덩치 큰(그래봤자 몇 메가바이트였지만) 파일을 전송하다 보면 중간에 접속이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몇 번에 걸친 시도 끝에 성공한다고 해도 나중에 그 내용이 제대로 받아졌는지도 의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전화료 또한 엄청났다.

컴퓨터 통신을 한다고 열심히 밤새다가 전화료 때문에 부모들이 컴퓨터 통신을 강제로 해지시키거나 아예 컴퓨터를 없애버리는 경우까지 심심찮게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일들은 대부분 채팅 때문에 벌어지곤 했지만, 해외에서 공수된 따끈따끈한 프로그램을 다운로드받는 것은 인터넷이 일반인에게 가깝지 않던 시절에 컴퓨터를 공부하거나 취미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일상이었다.

그런 시절, 요즘과 같은 고속의 PC 통신이란 것을 생각도 못하던 그 시절에, 마치 목마른 대지에 물을 대준 것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파일 압축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으로 ZIP 파일을 대면했을 때 뭔지 몰라 당황스러웠던 느낌, 그리고 처음으로 ZIP 포맷으로 파일을 압축하고 풀어냈을 때의 그 감동은 아직까지 기억속에 아련히 남아있기까지 한다.

그 이후로 10년이 지나는 동안, 초창기부터 ARC, ARJ, LZH 등의 다른 압축 형식이 있어왔고 또 RAR같은 새로운 것도 등장했지만, 아직도 절대 다수의 파일들이 ZIP 형식으로 압축된채 인터넷을 통해 오가고 있다.

ZIP 형태로 압축하고 다시 풀어내는 프로그램으로서의 원조는 PKZIP과 PKUNZIP이었다. 온라인 자료실에서 pkz204g.exe같은 이름의 파일을 내려받고 실행하면 이들 실행 파일들이 추출되어 나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스상에서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향후에 윈도우 3.1로 환경이 바뀌면서도 한참 동안 이것을 사용했었다. 그게 나중에 WinZip으로 세대교체 될 때까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필자도 단지 ZIP 형식의 파일을 사용하기만 했을 뿐 그걸 누가 만들었고 지적재산권으로 등록돼 있는지 여부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긴 셰어웨어 개념도 모호하던 때였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WinZip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이제까지 도스창에서 수행되던 압축과 추출 과정이 윈도우상에서 이뤄지는 것이었다.

컴퓨터 사용자들이 너도 나도 PKZIP을 지워버리고 WinZip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ZIP이라는 압축 방식을 개발한 업체에서 PKZIP 및 PKUNZIP, 그리고 WinZip을 다 만들었으리라고 생각했다. ZIP이라는 압축 파일 형식이 당연히 최초 개발 업체의 특허로 등록돼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다 그랬듯이 도스용 프로그램에서 윈도우용으로 기능을 바꾸면서 Win이라는 접두사를 붙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지난 2000년 4월에 미국 어딘가의 모텔에서 필 캐츠(Phil Katz)라는 사람의 시신이 발견됐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의 사인은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인 것으로 알려졌고, 그의 시신 옆에는 역시 마시다 만 술병이 하나 발견됐다고 한다. 그가 바로 1986년에 어머니의 부엌 테이블에 놓인 컴퓨터에서 맨처음 ZIP의 아이디어를 구현했고, 그후 PKWare社를 설립하고 1989년에는 PKZIP과 PKUNZIP 프로그램을 발표한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PKZIP이라는 파일명에서 ZIP 앞에 붙는 접두사 PK를 ‘Pack’의 단축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필 캐츠라는 성과 이름의 첫 자를 따서 PKZIP이라고 부르고 회사명도 PKWARE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ZIP이라는 파일 형식은 알아도 PK, 즉 필 캐츠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어 스타가 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의 죽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필 캐츠는 비록 회사를 설립하긴 했지만 ZIP 형식의 압축 방식이나 파일 이름 어느 것도 개인 소유의 지적재산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누구나 ZIP 압축 방식과 호환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고 또한 ZIP이란 명칭을 부담없이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덕분에 국산 압축프로그램인 알집(ALZIP)도 그렇고 윈집(WinZip)도 마찬가지고, 또 시중에서 보이는 수없이 많은 ZIP 형식의 압축 프로그램들도 아무런 제약없이 만들져 사용돼 온 것이다.

PKZIP 프로그램도 윈도우 버전이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지만 개인 컴퓨터 사용자들에게는 그리 친근하지 않다. PKWARE는 개인용보다는 기업용 시장에 주력하고 있어서이다. 그래서 MS 윈도우 버전 이외에 유닉스와 리눅스, OS/2, VMS같은 다양한 버전을 내놓고 있다. 아무튼 윈도우를 사용하는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압축 프로그램으로서 WinZip이 거의 표준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다.

다른 여러 가지 압축파일 형식 중에서도 ZIP 방식이 10여 년 동안 계속 인기를 누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ZIP 파일을 써왔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예전 DOS 시절에 압축해 놓은 ZIP 파일을 최신 버전의 WinZip을 사용해도 문제없이 풀어낼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패스워드를 인크립트하는 방법도 10년 전이나 요즘에나 마찬가지라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른바 ZIP 2.0 규격이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인데, 맨날 업그레이드라는 명분 아래 셀 수 없이 버전 번호가 올라가고 또 기능도 자주 바뀌는 것에 비해 아주 큰 장점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압축 프로그램을 만들어 파는 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장점이 전혀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허구헌 날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내면서 떼돈을 긁어모으고 싶은데 항상 똑같은 파일 포맷을 가지고는 그렇게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ZIP 형식의 단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가장 많은 듣는 이야기는 바로 패스워드 보호의 취약성이다. 시중에는 예전부터 ZIP 파일의 패스워드를 푸는 걸 도와주는 몇 가지 유틸리티까지도 존재해온 게 사실이다.

이제 ZIP 압축프로그램 업체들은 패스워드의 보안 성능을 높인 버전을 내놓기 시작했다. 먼저 나온 것이 올해 초에 발표된 PKWARE의 PKZIP 6이었다. 그 뒤를 WinZip 9.0이 이었는데, 두 회사 모두 RSA 기술을 사용한 256비트 AES(Advanced Encryption Standard) 방식을 사용한 것은 비슷하지만 두 회사의 새로운 ZIP 포맷은 서로 호환되지 않게 돼있다. 게다가 PKWARE는 압축 포맷을 공개해 다른 업체들이 이를 따라가는 것을 허용했지만 WinZip의 포맷은 공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WinZip이 ZIP 압축 프로그램 시장을 선도해 왔지만, 그것은 파일 규격이나 기술을 가지고 그랬던 것은 아니고 단지 더 보기 좋고 사용하기 좋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업용에 주력하는 PKZip의 경우는 보안 성능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WinZip을 주로 쓰는 개인 사용자들은 그런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고 단지 인터넷 상의 어느 누구와 어떤 파일을 교환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을 원할 뿐이다.

반드시 높은 보안 성능이 필요한 경우에는 필자가 하는 것처럼 문서를 전송하면서 그 위에 무료로 제공되는 PGP 프로그램을 사용해 암호화하면 된다. 비록 옵션 항목이지만 그런 향상된 보안 기능은 ZIP 파일이 사용되는 목적과 용도를 생각할 때는 거의 사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 생각하면, 압축 프로그램 업체들이 비록 옵션 기능이지만 서로 호환되지 않는 압축 포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마치 최초의 유닉스가 결국에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수많은 변종으로 가지치기를 하게 된 것처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ZIP 파일의 경우는 그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오랫동안 ZIP 2.0이 아무 문제없이 사용돼 왔고 또 일반 사용자들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원치 않는다면 그런 결과는 빚어지지 않을 것이다. ZIP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두고 차라리 보안이 향상된 새로운 이름의 파일 형식을 만들어 이원화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아무튼 변화를 시도하려는 업체들에게는 어느 모텔 방에서 외롭게 죽어간 PK의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ZIP 2.0을 그대로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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