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 것은 이른바 ‘벤처회사’를 만들어 대박의 꿈을 실현시켜 보겠다는 의지에서였다. 유명 외국 전자업체의 한국 지사에서 잘 나가는 자리에 있었는데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잘 해봐라, 필요하면 도와줄게”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었다.
회사를 설립하고 사무실을 얻고, 그리고 함께 일할 파트너를 둘 정도 얻은 다음, 그는 자신의 사비를 털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신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가끔씩 연락을 해보면, 현재 설계가 반쯤 진행됐다거나 내년 초에 칩 샘플이 나온다거나 하는 소식을 들으면서 잘 해나가고 있구나라고만 알고 있었다.
몇달전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 연락을 해보았다. 제품이 나오기로 예정된 시점에서 훨씬 벗어난 때였다. 그런데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 친구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국 반도체 회사의 칩 장사를 하고 있어…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원래 그가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일종의 FM 무선 송신기였다. 휴대폰이나 CD플레이어 등의 오디오 신호를 무선 송신기를 통해 카스테레오에게 전송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자동차 안에서 FM 라디오의 주파수를 빈 곳에 맞춰놓은 다음, CDP나 MP3플레이어같은 휴대용 오디오 기기의 이어폰 잭에 그 송신기를 연결하면 음악은 선을 따로 연결하지 않아도 자동차의 FM 라디오를 통해 카스테레오에서 울려퍼지게 되는 원리이다.
그런데 초기 개발 도중에 발견한 사실은 국내 다른 업체들 몇 군데에서도 그런 송신기 모듈을 개발중이거나 이미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단지 그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판매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어떤 MP3 플레이어 제품들은 아예 송신 모듈을 내장하고 있는 제품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 단계에서 급선회를 결심했다. FM 송신 모듈을 만들려면 회로기판과 여러 개의 부품이 필요하지만, 그 모두를 한 개의 조그만 칩 속에 집어넣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였다. 그렇다면 기존의 FM 송신 모듈 업체들은 물론 그 기능을 자사 제품에 내장시키려는 업체들이 모두 고객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즉시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짠 다음, 개발에 착수했다. 그동안 저축했던 개인 재산이 계속 투입됐고 집에는 한 푼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래도 그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 1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 어느 정도 개발이 완료된 상태에서 외국 바이어를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그러길 몇 달. 별다른 소득이 없자, 직접 칩 샘플과 실제 동작하는 송신 모듈을 가지고 미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필자가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 미국방문이 있은지 두세달쯤 뒤의 일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자동차를 렌트한 다음 우리 제품을 연결했어. 그쪽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말야… 그런데, 그걸 사용할 수가 없었어… 한국에선 FM 방송국이 띄엄띄엄 있어서 빈 공간이 아주 많았는데 이곳에선 빈 공간을 찾으려면 엄청 힘든 게 아니겠냐.”
그랬다. 그게 현실이었다. 미국의 대도시에선 FM 라디오의 주파수 공간이 포화상태였던 것이다. 조금씩 공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개발한 제품은 CD 수준의 음질 보전을 위해 일반 FM 방송보다 더 넓은 주파수 대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빈 공간을 찾기 위해선 적지않은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에서 전파를 관리하는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규정도 문제가 됐고, 기타 한국에서와 다른 여러가지 환경이 그를 괴롭혔다. 더 이상 개발을 진행할 자본도 기력도 남지 않고 투자가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을 털어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미국시장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위의 사례는 필자의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실제로 겪은 일이다. 그 당시는 필자가 미국의 MP3 플레이어 업체인 소닉블루에 있던 시절인데, 그 친구를 도와 실제 리오(Rio) 브랜드 모델들에 도입하려고 신경을 꽤 썼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미국 본사의 마케팅에서는 도대체 단 한 사람도 이런 제품 개념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성의 부족에서 나온 일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사실은 제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서였다. 안타까운 점은 이 친구 외에도 그런 FM 송신 모듈을 가지고 필자와 미팅하러 왔던 업체가 몇 개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바로 미국에서 틀림없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도 이걸 만들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는 점이었다. 꼭 같은 기능을 어떤 업체는 라이터 크기 정도로 만들었는데, 또 다른 업체는 소형 캠코더 사이즈로 만들어 놓고 이런 개념의 제품은 처음일 것이라며 어깨에 힘을 주기도 했다.
여기서 마케팅 부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위에서처럼 실패한 업체들을 보면 모두가 마케팅이라고 할만한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두세 명이 모여서 만든 회사는 물론 수십 명이 일하는 회사에서도 시장 조사는 물론 제품의 주요 시장에 대한 상황 인식을 전혀 하고 있지 못했다.
어떤 업체에서 온 사람은 마케팅 담당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마케팅쪽 일을 하지는 못하고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며 물건 팔아달라는 세일즈 업무만 할 뿐이었다. 하이테크를 위한 마케팅은 세일즈보다는 오히려 개발쪽에 더 가까워야 할텐데 말이다.
휴대폰보다 작은 초소형 MP3 플레이어는 그 버튼 크기가 너무 작아서 대체로 우리보다 손이 큰 미국인들이 사용하기 어려운 데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성공을 자신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어떤 업체에서는 미국 FCC 규정을 실제와는 반대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는 등 많은 경우가 아전인수격이었다.
요즘엔 소규모 중소기업이거나 벤처 기업일지라도 힘들여서라도 해외 지사를 설립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있다. 또한 마케팅이라는 것에 조금씩이나마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위의 예에 보인 업체들이 충분한 마케팅을 했다면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대다수의 소규모 벤처 기업들은 그쪽에 신경을 쓸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나 비용면에서의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좋은 제품을 만들면 잘 팔리지 않겠는가’라는 단순한 논리만으로 미래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기술에 투자하는 만큼 마케팅에도 같이 투자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보다 먼저 개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팔지 계획하는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