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 eXperience Problems?

By | 2001-09-06

과거를 돌이켜 보면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 구입해 썼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학 시절에는 정품 소프트웨어 패키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거의 100% 소프트웨어를 복사해 사용했다. 대부분이 애플 II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였는데 정품 소프트웨어를 취급하는 곳도 사실상 없다시피 했을 때니까 그것이 당연시 여겨지던 때였다.

그 당시에 카피 프로텍션이 걸린 디스크의 복사를 위해 사용했던 소프트웨어가 ‘카피 II 플러스’라는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복사해 썼고 원래 그것 자체가 상용 프로그램인지도 몰랐다. 하긴 그 당시는 상용 프로그램의 개념조차 없었으며, 단지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실제로 돈 주고 사서 쓴다더라’고 하는 전설같은 얘기만 들었을 때였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PC 호환 기종을 사용하게 됐는데, 집에서 쓰던 PC에서는 여전히 불법복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애플 시절의 전통을 이어받은 ‘카피 II PC’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를 흔히 사용하곤 했다. 회사에서는 정품 소프트웨어를 쓰긴 했지만 그곳에서도 복제된 것이 정품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것이 대략 10년 전이었나 보다. CD-ROM 드라이브나 메이커 PC를 구입했을 때 번들로 따라온 소프트웨어들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귀중한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면 불법복제를 했던 소프트웨어들은 내 생활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단지 도스나 MS 윈도우같은 운영체제, 그리고 아래아 한글과 워드 정도의 문서 작성기 정도만 제 구실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모두 정품을 구입해서 쓰게됐다.

그밖의 다른 소프트웨어들은 단지 맛보기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즉 한 번 설치해서 한동안 만지작거리다가 호기심이 충족되고 나면 지워버리는 정도. 그 많은 그래픽 프로그램과 CAD 프로그램, 그리고 게임 프로그램들이 다 마찬가지였다. 단지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 거금을 들여 정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것은 불법복제를 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사람들마다 다들 의견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필자를 비롯해서 내가 알던 그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전역을 통틀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소프트웨어를 복제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잠깐 그 ‘맛’을 봤다. 물론 그중 일부는 ‘맛보기’의 차원을 벗어나서 배 터질 정도로 먹어대기도 했을 것이다. 10년 전이고 20년 전이고 양으로 볼 때 소프트웨어 불법복제의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며, 지금도 그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하지만 MS-DOS의 버전 1.0부터 6.2까지 그렇게 마구 복사해서 써댔는데도, 윈도우 2.0부터 2000까지의 온갖 버전을, 그리고 그밖의 많은 소프트웨어들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스탬프 찍어대듯이 복사해서 써댔는데도, 그것들을 만들어서 팔았던 MS라는 회사는 엄청나게 자라나서 세계를 호령하는 거대기업이 되었고, 그 맹주인 빌 게이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나머지 돈이 너무 많아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돼버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져보기로 하자. 만약 사람들이 소프트웨어를 불법복제하지 않았다면, MS는 훨씬 더 큰 회사가 되고 빌 게이츠도 더 큰 부자가 되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판매가 그토록 늘어난 것은 불법복제할 수 있는 쓸만한 소프트웨어가 많아서였고, 그에 따라서 PC 사용 인구가 늘어났으며, 결과적으로 소프트웨어의 수요도 늘어나는 공조체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제 MS는 그런 유기적인 발전 과정에는 흥미를 잃은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커질대로 커진 덩치를 더욱 키워서 세계 정복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한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거둬들이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윈도우 XP와 오피스 XP라는 두 XP 브라더스의 등장을 통해서 말이다.

독자 여러분 모두 익히 들었다시피 두 XP 형제를 설치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직접 전화까지 걸어야 하는 까다로운 사용자 인증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함부로 다른 컴퓨터에 설치하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학생들이 예전처럼 인심 팍팍 쓰면서 친구들에게 복사해 주지 못하게 됐다. 정말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MS의 저의가 무엇인지 정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그런 식으로 불법복제 방지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해커들에게 다 풀려서 소용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예측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었던가? 더구나 소프트웨어의 수재, 천재들이 수백 수천 명이 모여있는 울트라-수퍼-메가 기업체인 MS에서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생기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벌써 오피스 XP와 윈도우 XP의 크랙 버전이 당당히 나돌아다니고 있다. 호기심이 난 나머지 다운로드를 받아 놀고 있는 PC에 두 가지 모두를 설치하고 각각 크랙 프로그램을 하나씩 실행시켰더니 오피스 XP에서는 등록 메뉴에서 “이 제품은 이미 등록되었습니다”라고 친절히 알려주고, 윈도우 XP에서는 아예 등록하라는 메시지가 사라져 버렸다.

물론 윈도우 XP는 RC2 버전이었기 때문에 최종 버전에서는 다소 상황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MS에서는 이미 PC 업체에 마스터 CD를 배포했기 때문에 그리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또한 크랙 방법도 여러 가지 다양하게 개발된 덕분에 아주 편리하게 불법복제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과연 MS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까지 불법복제를 했던 사람들은 어쨌든간에 계속 XP 브라더스를 불법복제해서 사용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별로 달라질 일이 없다. 하지만 정직한 정품 사용자들에게는 이제부터 고생문이 열리기 시작할 수도 있다. 꼬박꼬박 MS가 시키는 대로 정품 인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XP라는 명칭이 ‘eXperience Problems’의 약자라는 소문을 몸소 체험하면서 말이다.

LP에 이어 카세트 테이프가 발명된 후에도 음반산업은 계속 성장해 왔다. MP3 기술이 개발되고 냅스터 서비스가 시작된 뒤에도 전세계 음반 판매율은 성장을 계속했다. 인터넷을 통해 미처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들이 동화상으로 뿌려지는 상황에서도 블록버스트 영화들의 흥행은 신기록을 기록했다.

이런 마당에, 사용자의 불편함만 가중시키는 MS XP 인증 방식은 정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들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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