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isk? High-Return!

By | 2001-04-16

어린 시절에 부잣집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먹고픈 것, 사고픈 것을 맘껏 살 수 있는 그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감히 저렇게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운명적인 신분 의식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정도는 아니겠지만 요즘도 가끔 들을 수 있는 성골, 진골, 평민 계급의 차이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잘 살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해야 저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잣집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도 좋고 못해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미 돈도 많은데 뭘···.

우리 사회에서 재벌집 자제들이 벤처 바람을 타고 서로 앞다퉈 벤처 업계에 뛰어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되지 않았다. 작년쯤이었나 싶다. 정말 그네들이 하는 일을 보니까 폼이 나긴 했다.

막강한 재원을 바탕으로 기존의 군소 하이테크 벤처 기업들을 인수해서 마치 벤처 그룹을 만들듯이 했고 자기네 아버지들이 소유하는 대기업의 지원을 등에 업고 뻑적지근하게 일을 벌이면서 매스컴을 장식하기도 했다.

아예 그런 2세, 3세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모여 새로운 경제 패턴을 창출하겠노라고 컨소시엄을 만든 다음, 손에 손을 잡고 멋진 사진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벤처 진입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기존 벤처 영역의 한계였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기존 벤처의 영역이 있는 반면, 대규모의 자본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벤처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이테크 주가가 급락해서 반토막은 커녕 반의 반토막도 안되는 이때, 그들의 벤처를 돌아보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어느 재벌집 2세는 순식간에 자신이 구성한 벤처 그룹으로부터 발을 빼버리고 부친의 그룹 임원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기존에 그의 휘하에 있던 벤처들은 부친의 그룹에 인수되기도 하고, 혹은 자력생존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문을 닫고 방빼기 직전에 있기도 하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몇년 간은 적자를 감수하고 추진하겠다고 말한 인터뷰가 실린 신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말이다.

다른 몇몇 재벌집 자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도 역시 사업가의 피는 못 속이는지, 그들은 손해를 보고 기업을 넘기진 않는다. 재벌 총수의 자리를 승계할 비즈니스 감각 덕분이 아닐까 싶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말이다. 무슨 방법인지 궁금한 독자는 외국의 한 경제지가 소개한 한국의 재벌 자제들의 벤처 기업 처리 방법에 대해 쓴 기사를 감상해 보기 바란다(http://globalarchive.ft.com).

“자기 사업이 곤경에 빠졌을 때 닷컴 기업가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쉬운 질문이다. 바로 아빠(daddy)가 소유한 기업에(비싼 값에) 팔아버리면 된다”

필자가 벤처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위와 같은 행태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좀 나쁘다. 부잣집 아이들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한 피해의식 때문일까? 걔네들은 반드시 공부를 잘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대개는 집안의 지원 덕분에 공부를 잘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하는 것 하나만으로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부럽기도 했지만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특히 그런 것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만약 수많은 벤처 기업가들이 죽기 살기로 추진하는 일을 누군가가 장난하듯이 혹은 재벌 그룹을 상속받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대그룹에게는 껌값에 불과한 돈이 벤처에게는 엄청난 돈이 되므로 그런 돈을 받고 지분을 넘겨서 이익보는 사람도 있을터인지라 경우에 따라서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사람도 있겠지만, 그 사원들은 어떨까?

재벌 2세들은 그들 소유의 벤처가 어찌 되든 아무 손해도 보지 않고 빠져나간다. 바로 여기서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보는 듯하다. 그들은 어찌되었든 성공하게 돼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제까지 알아온 벤처의 기본은 바로 High-Risk, High-Return이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벤처의 기본을 또 목격했으니 바로 No-Risk, High-Return에 입각한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제 벤처는 이 두 가지로 구분돼 하나는 성골 벤처, 다른 하나는 진골 벤처로 구분돼야 할 것 같다.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평민 벤처로 칭해버리면 된다. 사실 그네들이 자신들이 벤처 기업을 한다는 식으로 소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오너가 폼잡다가 잘 안 먹혀서 발을 빼면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기 때문에 벤처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 오너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튼 이 나라는 자본주의 자유경쟁 체제이므로 맘대로 해도 뭐라할 수 없다. 벤처든 성골이던 뭐든 좋다.

제발 벤처 갖고 장난을 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목줄을 위협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벤처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지는 말기 바란다. 당신들은 전혀 위험부담이 없지 않은가? 당신들은 벤처 기업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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