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기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본능이 있다. 골프에서 타이거 우즈가 공을 치는 것을 함께 보고 있으면서도 어떤 이에겐 그게 무지막지하게 후려치는 것으로 보이고, 어떤 이에겐 궤도 상에서 부드럽게 회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어차피 자신이 중시하는 측면에서 사물과 현상을 볼 수 밖에 없다. 기존에 그러리라고 믿고있던 방향으로 보게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동그라미라고 설명해도 만약 그 사람에게 네모라고 인식되면 그사람에겐 그게 진실이 된다. 혹은 그게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 나에게 이 도형이 사각형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나에게 그것이 삼각형으로로 밖에 안 보인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 의식은 단지 눈의 수정체를 통해 망막에 맺힌 영상을 뇌가 전달받은 뒤에 많은 뇌세포의 도움을 받아 경험적으로 그것이 ‘삼각형’라는 출력을 받아서 그에 맞는 단어를 추출하여 입으로 내놓을 뿐이다. 이것을 바로 잡거나, 혹은 또 다시 왜곡하기 위해선 ‘세뇌’라는 작업을 거치면 된다. 눈으로 들어오면서 입으로 나올 때까지의 어떤 경로에서건 뇌세포와 신경의 연결들을 재설정 해 놓는게 세뇌 작업이다.
이런 세뇌가 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판단이 누적된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뇌세포에 누적되어 감각과 판단과 기억에 관련된 지도를 만들어서 어떤 자극이 있을 때마다 그 정보를 대뇌에 전달해준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망막에 맺히는 물체의 영상은 거꾸로 뒤집혀있다. 우리가 돋보기를 들고 눈에서 좀 더 멀리 떨어뜨려 놓고 볼 때 렌즈 렌즈를 통해 보는 이미지는 위 아래가 뒤집혀 보이는 것처럼이다. 태어나서 아무 정보도 없는 눈과 뇌의 연결관계가 계속 경험을 계속한 한 끝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톡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착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각이나 다른 자극에 대한 반응 이외에도 사람들의 순수한 정신 작영의 범주 안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은 더 이상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착각이나 오류가 아니라 개인들끼리 서로 다른 성격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 결과가 되기도 한다.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목소리가 너무 낮설고 이제까지 자신이 직접 들어왔던 것과는 영 딴판이라는 점에 놀라게 된다. 예전에 나도 당연히 그런 경험을 했었는데 그때 궁금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는 목소리도 이럴까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직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내가 듣고 있는 이 목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겠구나, 내가 이 목소리를 들으며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 녹음된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각각의 고막에 전달되는 음파는 과학적 분석에 있어선 비슷하겠지만 그것이 최종 판단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그 사람 각각의 경험, 소리에 대한 선입견, 취향, 나에 대한 사전지식, 지금 처해있는 상황 등등의 많은 요인이 작용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에 따라 독립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즉 감성적인 후처리 영역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그 이전에 녹음되지 않은 내 목소리를 들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의 영향을 받는다. 장님 몇 사람이 코끼리 만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는 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개인이 어떻게 인식될지를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은 단순히 사진기로 찍은 이미지로서만 보이진 않는다. 내 목소리와 내 걸음걸이와 손짓, 그리고 나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 그 사람의 이제까지의 축적된 경험 등에 의해 그의 두뇌 속에 저장되고 판단되는 나의 모습이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그만이 갖는 나에 대한 인상이다. 그의 나에 대한 언행은 그런 두뇌작용에 의해 제어되어 나가며 나는 그와의 교류를 통해 그의 두뇌 속에서 가능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있도록 그의 앞에서는 어떤 한가지 패턴을 정하여 그것이 대표하는 총체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을 위한 하나의 ‘가면’이 되어 나의 생활에서 필수품으로써 작용한다. 결국 나는 서로 다른 가면을 여럿 만들어놓고 나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 주기 바라는 사람 앞에 설 때마다 그에게 맞는 것을 한개 찾아 쓰게 되는 셈이다.
이건 모든 사람들의 본능적인 행위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가면의 존재를 모르면서 살고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동그라미라고 보는 도형이 다른 이들에겐 삼각형 혹은 또다른 도형이라고 인식할 수도 있음을 모른다. 누가 그걸 삼각형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간주할 뿐, 그 상대방의 머리속에서 다른 그림이 그려지거나 다른 단어가 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갈등이 빚어질 때 사람들은 그 해결을 위해 서로에 대한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가면은 시간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상대방의 상대적 지위에 따라서도 계속 그 모양이 변하기도 한다.
뒤늦게나마 그 가면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제까지 그 가면을 내가 직접 만들어 써온 것이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사실은 가면이 어떤 모양이어야 한다고 설계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고 나는 내 의식의 안쪽에서 그 가면을 그들이 원하는대로,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모양대로 만들어 썼을 뿐이다.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도 나에 대해 그런 가면을 만들어 썼을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거리를, 학교를, 직장을, 교회를, 심지어는 가정을 생가해 보면 마치 서양의 가장 무도회, 즉 매스커레이드 (Masquerade)를 연상케 된다. 어차피 가면은 다 함께 써야만 모든 일이 부드럽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돌아갈 것이다.
간혹 이러한 가면을 평소엔 안 쓰고 있다가 꼭 필요할 경우에만 잠깐씩 쓰는 사람도 있고 나와 함께 있을 때 가면을 벗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있는 상대는 나 혼자, 혹은 상대방 혼자서 결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가면을 안쓰고 있어도 상대방은 계속 가면을 쓰고 있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가면없이 대면할 수 있는 인간 관계에서, 나와 상대방 두 사람의 자세는 신뢰와 이해가 우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운명적인 일체감이 있어야만 그게 가능해진다.
어느 사람의 가면은 술에 취하면 벗겨지기도 하고, 알콜과 분위기와 다른 사람들의 압력에 의해 얼굴에 쓴 채로 산산이 깨지기도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침대에서 절정의 순간에, 가슴아픈 일이 일어났을 때, 내차를 위협하면서 운전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혹은 전쟁터 같은 인간 본성이 극한에 다다르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런 가면은 쉽게 깨진다. 이런건 ‘유리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어느 사람의 가면은 죽을 때까지도 벗겨지지 않는다. 그 자신도 가면의 존재와 강도를 전혀 모른다. 죽을 때까지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가장무도회의 구석에서 꼼짝않고 자리를 지키는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은 철가면이다. 마치 알렉산더 듀마의 소설에서처럼 죽을 때까지 지하감옥에서 그걸 쓰고 있어야 하는 존재와도 비슷한 처지이다. 자신이 알고 있건 모르는 채 계속 쓰고있던 철가면, 그걸 쓰고 있는 사람은 외롭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고 싶어도 못보이는 처지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는 정작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 어떤 생김새의 가면이고 누구 앞에서 쓰고 또 누구 앞에서 벗을까. 나의 가면은 유리가면과 철가면 가운데 어느 쪽일까. 내가 아는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선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알고 싶어도 어디까지 가면이고 어디부터 얼굴인지 모르는 이상, 보이는 그대로 보고 말겠다. 녹음된 내 목소리가 나에게 어색하고 남의 것처럼 들리듯이, 내 가면 쓴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게된다면 그렇게 낯선 얼굴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가면을 써왔기에 가면을 쓰지 않는 내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어색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