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달 전부터 생각만 해오던 점입니다만 게시판에서 어느 분이 쓰신글에 이삿짐으로 가져온 세탁기가 가동 즉시 사망했다는 내용을 보고 요즘 태국에서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 하는 중입니다. 그 분뿐 아니라 다른 몇몇 분들도 세탁기는 물론 냉장고나 심지어는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까지도 폭발(!)하거나 망가졌다고 하시더군요. 과연 왜 그런걸까요? 다행히 저희 집에선 이제까지 그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건 한국에서 가져온 것들이 그저 쿠쿠 전기밥솥과 무선전기주전자 및 컴퓨터 3대 밖에는 없어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삿짐으로 집안살림을 통째로 가져오신 분들은 여러가지 문제를 겪기도 하시나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집은 괜찮고 우리집만 문제가 생기냐.. 왜 어떤 물건은 괜찮고 이 물건들만 고장나냐.. 이런 의문이 생기죠. 어떤 분들은 가정용 전기의 주파수가 한국(60 헤르츠 Hz), 태국(50Hz)로 서로 달라서 그럴 것이라고 그저 막연한 해석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태국의 전원이 워낙에 불안정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면서 근본적인 원인은 알 길이 없으므로 운에 맡기거나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이른바 헤르츠 변환기(?)라는 것을 구입해 쓰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헤르츠 변환기라는 것은 저를 비롯한 몇분이 누누이 헤르츠 변환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라고 설명을 했어도 여전히 대다수 분들이 해외이주 공사에서 권장한다는 이유에서, 또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뭐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뭐.. 하면서 쓰고 계십니다. 그걸 사용함으로써 없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므로 저도 요즘은 더 이상 그걸 설명하려고 애쓰진 않습니다. 플라시보 효과를 빌어 정신적 안정을 취하는 것도 좋은 일일테니까요. 물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헤르츠 변환기능을 실제로는 제공하지 않는 장치이지만 모델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안쓰는것보다 나은 점도 있긴 합니다. 진짜로 변환을 해주는 장치도 있지만 가정용은 아니죠.
사실상 가정용 전원의 주파수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자제품이 갑자기 폭발하거나 불에 타는 것은 그리 쉽게 발생하는 일은 아닙니다. 전원 주파수의 변화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동작상의 변화는 이 전원을 직접 사용하는 모터가 달린 장치들의 특성 변화입니다. 가령 선풍기의 날개 회전속도가 조금 느려지거나, 믹서의 칼날 속도가 조금 떨어지거나 하는 일들이죠. 제품마다 다르지만 그 내부의 다른 구성 요소에 따라 60Hz 전용 제품을 50Hz에서 사용할 때 회로 동작차로 인해 전류가 조금 더 흐르면서 이전보다 발생하는 열이 더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만 그 제품의 수명을 약간 짧게 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을 뿐 급격한 고장이나 사고 발생 가능성은 크지 않을겁니다. 한편, 예전엔 220V 전원이 직접 연결되는 모터를 쓰는 제품이 많았지만 요즘엔 그걸 DC로 정류한 뒤에 모터를 돌려주는 방식이 많아져서, 가령 DD 방식 드럼 세탁기같은 경우엔 전원주파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부 전자레인지의 경우엔 교류전원을 직접 마그네트론 (초고주파 발생장치)을 구동하는 방식이라 동작이 불안정하거나 쉽게 고장이 날 수도 있다고 하구요.
또다른 가능한 영향으로는 각 전자제품의 내부에 있는 전원장치의 효율 및 특성 변화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용량의 소형 DC 어댑터 같은 것들은 열이 약간 더 발생할 수도 있지만 고효율 고용량의 스윗칭 방식 DC 어댑터들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죠. 데스크탑 PC 에 쓰이는 전원장치도 이른바 스위칭 파워 (SMPS) 라서 전원전압의 변동이나 헤르츠 차이는 거의 무시할 수 있고 노트북 PC의 전원장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기능의 회전기구나 전열기구들, 가령 선풍기, 헤어드라이어, 다리미, 토스터, 무선 전기주전자, 믹서 등은 거의 영향 받지 않습니다. 그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회전속도가 느려지거나 열량이 조금 약해질 뿐이죠.
그렇다면 진정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선 이 점부터 살펴보죠. 아주 옛날 옛적, 우리나라가 아직 100V 전압만 쓰고 있던 시절에 TV나 냉장고를 만졌을 때 찌릿찌릿 전기가 느껴지는 기억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실겁니다. 그게 한국이 여러모로 발전하고 또 220V 전용으로 가면서 어느새 거의 사라져버린 현상이 되었습니다. 전압을 올려서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전압만 가지고 보면 오히려 더 위험해질 뿐이죠. 중요한 점은 집안의 벽에 있는 콘센트를 보면 220V 전압이 나오는 2 개의 구멍 옆에 제3의 구멍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접지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뉴트럴 선이고 오리지널 의미에서의 접지와는 약간 다르긴 합니다만 그냥 접지라고 불러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아뭏든 이게 생기면서 찌릿찌릿한 현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물론 오래된 주택이나 건물에서는 아직 그런 일이 있긴 하지만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건물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태국에 와서 살게 되면서 그 옛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TV를 만져도 찌릿, 냉장고를 만져도 찌릿, DVD를 만져도 찌릿, 세탁기를 만져도 찌릿, 컴퓨터도 그렇구요.. 나무 마루위에 서서 만지건 대리석이나 타일바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20V 가정용 전원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전자제품의 표면에 금속부분이 나와 있으면 대부분 그런 현상이 생긴겁니다. 새로 이사온 집에서는 상당히 괜찮아졌지만 이전 집에선 정말 심해서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번개만 쳤다하면 누전차단기가 내려가는 현상도 신경쓰였습니다.
이곳에서 벽의 콘센트를 살펴보면 구멍이.. 구멍이.. 2개씩밖에는 안 나와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문제의 그 접지선이 없는거죠. 새로 지은 집의 일부에서나 일부 특별한(?) 건물에서는 3구짜리 콘센트를 볼 수도 있지만 대개 없는게 보통입니다. 조금 오래된 건물들에서는 벽안쪽에 전선이 들어가있지 않고 벽면 위에 수십가닥의 전선을 연결해서 쓰는걸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죠? 그래서 한국에서 가져온 전자제품 가운데 3구 플러그가 달린 경우엔 본선은 2구가 달리되 분기선은 3구가 달린 멀티탭을 써서 해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예 뻰치로 접지선을 부러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늬는 3구짜리지만 실제로는 2선식 220V 전원을 쓰고 있는 것이고 벽에 3구 콘센트가 나와있지만 실제로 내부에서는 접지에 연결되지 않기도 하다더군요.
만약 위에서 말한 것처럼 찌릿찌릿한 현상이 있는 물건을 만질 때, 만약 내 발이 마루바닥에 있지 않고 바닥이 젖은 욕실에서 맨발로 서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의 경우 말고, 물기가 많은 곳에서 쓰일 때가 많은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제품들은 어떨까요? 그 금속 케이스가 어떤 식으로건 바닥에 직접 접촉하거나 받침대에 묻은 물기를 타고 충분한(!)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설상가상으로 누전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거나 제대로 동작을 하지 않는 경우라면 또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