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산업과 굴뚝 엔지니어

By | 2001-12-20

몇주 전에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현재의 집과는 정 반대쪽에 있는 데다가 별로 가볼 일도 생기지 않아서 졸업한 이후로는 자주 가보지 못했다. 역시 몇년만에 가본 학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건물이 들어차 있는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약 20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잔디밭에는 멋들어진 빌딩이 자리잡아 있었고, 추억을 만들었던 뒷산에도 어김없이 새 건물이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추억을 되새길 자리는 보이지 않아서 아쉬운 감이 들었지만 요즘의 대학들이 무슨 평가니 뭐니 해서 모두 외형면으로 돋보이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니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나간 것, 그리고 사라져간 것들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게 요즘의 세태가 아니던가.

행사중에 교수님들께서 하시는 얘기를 듣다 보니 건물이 들어서는 것 이외에도 뭔가 또 다른 식의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학과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필자의 전공은 전자공학이다.

20년 전에 학과를 선택할 때, 전자공학이라는 단어는 정말 멋지게 들렸다. 그 당시 막 성숙하기 시작한 전자계산학과와 같은 것도 첨단이라는 이미지를 주긴 했지만, 전자공학이라는 그 이름은 어린 시절부터 로봇이 등장하는 만화영화와 우주선이 광활한 우주를 항해하는 영화를 보면서 자란 우리 또래들에게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만화 영화 속의 로봇 과학자 김박사는 망치 하나만 들고도 거뜬히 천하무적 로봇을 만들고 또 수리하곤 했다. 그런 정도로 간단히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같이 입학했던 친구들 중에도 꽤나 필자와 같은 식의 꿈을 더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경우가 많았다.

필자도 초등학교 때부터 인두로 납땜질을 해가면서 라디오같은 것을 만들고 독학으로 무전기 설계까지 해보면서 그 꿈을 키웠다. 그래서 일찍부터 선택한 것이 전자공학도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었고, 결국 오늘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 ‘전자공학과’라는 이름을 바꿔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공학’이라는 이름이 수험생이 학부모들의 관심을 끌만큼 매력적이지 않고, 더욱이 ‘전자공학’이라고 하게 되면 오히려 3D 산업의 학과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벌써 이웃한 전자계산학과는 이름을 ‘컴퓨터학과’로 바꾼 상태였고, 덕분에 입학자들의 성적이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당연히 학교측으로서는 과명을 바꾸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일반 기업들에서도 이름 바꾸기가 유행처럼 돌았다. 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조금이라도 하이테크 냄새가 나게 만들기 위해 회사 이름이 ‘테크’같은 식의 접미사로 끝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그렇게 하면 증권시장에서 그 회사의 주가도 오르고 외부 투자도 받기 쉬워지고 입사 희망자의 수준과 숫자도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수박값에 팔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긴 전자공학과나 다른 공학 계통의 학과들이 3D 학과로 인식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엔지니어 생활 10여 년에 얻은 게 무엇인지 한숨 쉬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주식이나 부동산 관련한 것들도 공부해서 투자를 해야 하고 경제와 회계 관련 공부도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대그룹 전자회사에서 연구원으로 8년간 일한 뒤에 받은 퇴직금이 겨우 어느 국가 투자기관에서 1년 일한 뒤에 받은 퇴직금과 비슷한 액수라고 누가 웃어댄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필자의 퇴직금 액수를 믿지 않고, 거짓말이 아니냐고 반문까지 했었다.

엔지니어들도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새로운 칩들이 개발돼 나오면 그걸 다 파악해야 한다. 개발에 사용되는 수많은 장비들도 모두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컴퓨터는 6개월도 되기 전에 벌써 구형이 돼버리고, 엔지니어들은 또 다시 새로운 부품들을 파악하고 신기술과 규격 사항을 익혀서 끊임없이 개발을 해야 한다.

반도체 엔지니어도 매년 올라가는 클럭 주파수나 메모리 용량과 씨름을 해야 한다. 한 번 배워놓고 평생 먹고 사는 학문은 없겠지만, 매년 자신의 뇌세포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것은 전자공학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어느 직무를 하는 사람보다 못하진 않을 것이다. 결국 전자공학이 3D 라는 것은 어찌 보면 맞는 말인 것이다.

사회에서는 굴뚝 산업이 주업인 기업들도 이름을 바꾸고 있다. 예전과는 전혀 달라진 점이 아닌 똑같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대학의 전자공학과들도 이름을 바꾸는데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정보’ 또는 ‘통신’ 등과 같은 단어가 들어간 이름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무형의 정보통신 산업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하드웨어를 만드는 굴뚝 산업이고, 마찬가지로 실물을 다루는 공학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보통신 산업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입시생들에게는 인기없을지라도 제대로 대접받고 그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전자공학일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오늘의 바람이다. 필자도 죽을 때까지 영원한 전자공학도임을 자처하며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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