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아니고, 사진에 대해 열성적으로 연구하며 사진 촬영을 즐기는 매니아도 아니지만, 그래도 필자는 사진 찍는 것을 즐긴다. 물론 대부분이 아들 녀석이 중심이 된 가족 사진이다. 그래서 필름 구입과 현상, 인화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필름 구입이나 현상에 들어가는 비용이 현격히 줄었다. 게다가 작년까지 여러 해 동안 사용해 온 고전적인 캐논 EOS 사진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필름이 없어진 지금은 아무데서나 마음껏 사진을 찍고나서는 집에 돌아와 PC에 메모리 카드를 넣거나 USB 케이블을 연결해 그대로 하드 디스크에 저장해 버린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필름 인화업체에 사진 파일을 전송하면 이삼일 후에 사진이 배달된다.
PDA를 사용한 것은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래서 메모장이나 주소록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어디서나 PDA를 통해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고, 메모도 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게임도 하곤 한다.
한편 MP3 플레이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카세트 테이프나 CD를 구입하는 일이 급격히 감소했다. 듣고싶은 음악이 있을 때 가끔 구입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올라 있는 MP3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예전에 구입해서 갖고 있던 CD 내용도 몽땅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디지털 파일로 저장돼 있다.
CD 자체도 디지털 음악이지만 MP3는 그 세대가 다르다. 이제 음악도 더욱 디지털화된 것으로 듣고 있음이다. 오디오 시스템의 CD 데크는 6장짜리 체인저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166MHz MMX 펜티엄이 사용된 안쓰는 노트북 컴퓨터가 오디오 컴포넌트의 가장 위에 올라가 있다. 이것은 필자 집의 홈 네트워크를 통해 작업실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 있는 MP3 파일을 액세스해서 음악을 듣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작업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전화 자동 응답기도 마이크로테이프를 사용하는 방식의 장치가 고장난 이후에는 반도체 메모리에 저장하는 디지털 방식으로 바꿔 버렸다. 우리 주위의 휴대폰도 서비스 자체가 디지털 방식으로 바뀐지 이미 오래다.
몇달전 디지털 캠코더를 구입한 이후로 예전에 쓰던 소니 캠코더는 예전에 녹화했던 것을 볼 때만 쓰다가, 이제는 그나마 쓰지 않고 있다. 8mm 테이프에 담겨 있던 내용을 모두 4mm 디지털 테이프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아직껏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타이틀을 빌려볼 때는 VHS 테이프를 빌려서 VCR을 통해 보지만 조만간 DVD 플레이어를 구입할 예정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가전제품들이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었고, 이제 세상은 혹은 최소한 필자의 집 안은 정말 무척이나 디지털 천지가 돼버린 것 같다.
그래도 디지털 방식으로 옮겨가는데 있어 아직도 어려운 분야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종사하고 있는 MP3 업계가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세상은 아직 MP3 플레이어에 대해 그다지 관대한 눈빛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MP3 플레이어의 대중화 가능성에 대해서, 예전에 LP나 카세트 테이프에서 CD로 옮아가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천이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도 거의 80년대 전체를 통해서 이뤄졌으며, 자그마치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더구나 MP3에 있어서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LP 음반이나 카세트 테이프에서 CD로 옮겨가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변화만 취하면 됐다.
그저 CD 플레이어를 하나 구입하기만 하면 됐다. CD라는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 어려운 사용법을 배우거나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저 CD를 한 장 구입해서 데크에 넣기만 하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였다. CD가 디지털인지 아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MP3의 경우에는 컴퓨터를 통해서 음악을 다운로드받는 단계, 혹은 MP3 CD 플레이어라면 CD를 굽는 과정이 필요해 졌다. 바로 그 점 때문에 MP3 플레이어의 잠재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즉 기존의 것에 뭔가 새로운 기술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MP3 플레이어 기술은 킬러 애플리케이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디지털 카메라와 PDA, 디지털 캠코더 등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타난다. 디지털 캠코더는 그래도 기존의 아날로그 캠코더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훨씬 나은 편이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엄청난 기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VCR의 예약 녹화같은 것도 제대로 이용하는 사람이 적은데 디지털 캠코더의 막강한 기능을 누가 다 이용할 수 있을까? 그저 화질이 좀더 깨끗한 제품으로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필자의 컴퓨터에는 뒤쪽의 커넥터로부터 테이블 위쪽으로 나와있는 케이블이 여러 가지 있다. 디지털 카메라용 USB 케이블, PDA 동기를 위한 USB 방식의 도킹 크래들, 디지털 캠코더의 미니 DV 연결을 위한 IEEE-1394 케이블, MP3 음악 다운로드를 위한 USB 케이블 등이 있다.
USB 방식을 사용한 주변기기가 많다보니 일일이 케이블을 갈지 않기 위해서 아예 4포트짜리 USB 허브를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같은 엔지니어 출신의 호기심 많은 사람이들도 이런 것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사용할 때 좀 버거울 경우가 많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이 모든 것들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들을 위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들의 사용법까지 제대로 다루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다. 디지털 가전은 곧 복잡한 사용법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할 정도이다.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마다 초고속 인터넷이니 디지털이니 하는 시설을 설치하면서 광고를 해 대고 이젠 냉장고에까지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 광고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가전이 그동안의 도입기를 지나 실제로 사용자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착기로 발전해 나가려면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소비자들이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체화된 연결 방식과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즉 디지털 가전 기술에서의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 그것이다. 특별히 사용법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가전 제품, 여러 가지 주변기기와 케이블이 혼재해 있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가전, 그리고 미처 사용하기도 전에 소비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 없는 디지털 가전을 만들어 주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의 출현이 있기 전에는 디지털 가전은 여전히 과도기로 남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