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하이테크가 주도하는 시대가 됐다. 사람들은 하이테크가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신이 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자신의 직업이 하이테크라고 분류되는 일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High’는 높은 것이고, 나도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까. 남들보다 좀 처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다. 하이테크에는 돈 또한 몰리기 때문에 그만큼 사람들도 몰린다. 그만큼 투자가치가 있고 그래서 더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어서이다.
굴뚝 산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보통은 하이테크가 주는 편리함과 첨단성과 장래성에 의해 그런 경향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하이테크가 아니면 폼이 안나서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만물은 모두 상하좌우의 균형이 잡혀야 제대로 돌아가게끔 구성돼 있다. 직장에 사장이 있으면 신입사원이 있고, 막강 CPU도 최고속도로 돌아갈 때도 있지만 필요할 때는 파워다운 모드의 최저속도로 돌아갈 때도 있다. ‘High’가 있다면 ‘Low’도 있는 법이다.
로우가 제대로 받쳐주지 않는 하이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인체에서 대뇌가 하이라면, 항문은 로우이다. 뇌는 냄새난다고, 창피하다고 애써 아랫쪽을 외면하기도 하지만 그게 없거나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으면 그 육신은 세상과 하직해야 한다. 뇌가 망가진 식물인간은 숨쉴 수 있어도 엉덩이쪽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로우테크란 것도 있다. 하이테크의 정의가 좀 모호하긴 하지만 대충 생각해 보면, 발전을 시작해 각광받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정보산업과 반도체, 신소재, 바이오산업 정도를 주로 일컫다고 말할 수 있는데, 로우테크는 이런 종류의 일을 제외한 부문들 중에서도 더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노동력을 가지고 해왔던 일들을 말한다.
혹은 방법이 좀더 단순하면서도 더욱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일을 말한다. 망치로 못을 박는 일은 로우테크이다. 하지만 하이테크 사무실을 짓는 곳에서도 못박는 일은 필요하다. 톱으로 썰고 페인트를 칠하고,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물을 붇고 반죽을 만들어 바닥과 벽에 바르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DRAM 생산 대국이 되기 전에도 세계적인 수출 품목이 있었으니 가발과 모자와 안경테와 손톱깎기와 운동화같은 것들이었다. 자동화를 시켜도 여전히 모두가 상당히 ‘몸을 쓰는’일이었다. 요즘엔 중국의 인해전술에 밀려버렸지만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뭔가 문제에 부딪히면 ‘컴퓨터로 해결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게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컴퓨터로 가능한 일 가운데도 더 빨리 더 낮는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항상 존재한다. 로우테크를 사용할 때 말이다.
하이테크로 할 일과 로우테크로 할 일을 제대로 구분해서 해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하이테크를 연신 외쳐대는 가운데도 로우테크가 부족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경우가 많다. 일제 전자제품과 국산품을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을 들어보라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디자인의 차이를 든다.
디자인은 설계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디자인을 제대로 실물에 적용하는 기술이 중요하다. 여기선 그것이 금속을 다루는 기술과 플라스틱을 다루는 기술, 바로 기초적인 산업 기술이고, 로우테크이다.
컴퓨터나 라우터같은 하이테크 기기의 내부를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겉모양을 패션처럼 우아하게, 우주선처럼 정교하게 만들지 않으면 첫 인상을 구겨버리고 싸구려로 낙인찍히기까지 한다. 로우테크가 부족해서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OEM 제품의 상담을 위해 국내 업체를 자주 만나다 보면 하이와 로우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젊은 인재들이 모여 참신한 기능과 우수한 성능의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만나보면 그 껍데기를 너무 개념없이 만들어 실망부터 하기도 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로우테크의 중요성이다. 20여 년씩 오디오 기기를 했다고 하는 업체를 만나서 상담해 봤더니 성능의 안정성이나 생산 능력은 뛰어난 것같은데 도무지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이 아니고, 어떤 때는 그 장치 속에 들어가는 회로에 대해 너무 보수적으로만 접근한 것을 보기도 한다. 이럴 때는 그 제품들에 하이테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하이테크에만 젊고 창의성있는 젊은이들이 몰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반면 로우테크에는 그런 면이 부족하다. 하이테크 기업은 연륜과 경험과 몸쓰는 일이 부족하고 로우테크 기술에 대해 또 다른 3D 업종이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로우테크에는 하이테크를 활용한 혁신적인 접근이 부족하다.
여러 해전에 세계적인 ERP 소프트웨어 업체의 설계자들을 만났을 때 놀란 기억이 있다. 당연히 프로그래머들은 젊고 파릇파릇한 사람이 아닐까 했는데 그들은 백발이 성성항 중년에서 노년 사이의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기능적인 면의 프로그래밍은 머리가 휙휙 돌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실제 업무를 다루는 일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가능성을 확인하고 해결 방안을 완벽히 만들어내는 것은 실제로 현장에서 몸소 뛰어다니며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았던 로우테크의 경험을 충분히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의 현실을 돌아보면 역시 그렇다. 짧은 시간에 워낙 급격한 발전을 이루다보니 하이테크와 로우테크, 그 균형의 미덕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하이테크만이 능사가 아니다.
로우테크에도 눈을 돌려 하이와 로우가 함께 발전해야만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주변을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혹시라도 로우테크가 부족해서 망친 일이 눈에 띄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