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스타의 전설, 아래아 한글의 유산

By | 2001-02-04

1980년대 중반, 필자가 애플 컴퓨터를 사용하던 시절에 사용하던 소프트웨어들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볼랜드에서 개발한 터보 파스칼이었고, 다른 하나는 워드스타(WordStar)라는 워드프로세싱 프로그램이었다.

이 워드스타라는 것이 무엇인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개인용 컴퓨터 산업에 있어서 이것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미는 아주 크다. 오늘날의 워드프로세서의 기본이랄 수 있는 위지윅(WYSIWYG), 즉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대로 문서가 프린트되는 기능은 이 워드스타가 기원이다.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메모리 영역을 줄이기 위한 프로그래밍 기업인 오버레이 코드 역시 워드스타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고, 이는 오늘날의 DLL 파일의 원조가 됐다.

한편 다이나믹 페이지 혹은 계층이 있는 도움말의 원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존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같은 스위트(Suite)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아이디어는 이 워드스타를 개발한 마이크로프로라는 회사에서 캘크스타(CalcStar)와 데이터스타(DataStar)라는 스프레드시트 및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를 통합시킨다는 계획이 처음이었다. 가히 현대 워드프로세서의 시조라고 말할 수 있다.

워드스타를 만든 사람은 어셈블러 언어의 귀재라고 불리웠던 롭 바나비(Rob Barnaby)였다. 그가 1978년에 만든 첫 번째 워드스타 버전은 100% 어셈블러 언어로 작성돼 있었고 그 소스 코드의 크기는 13만 7000라인에 달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코드를 IBM의 전문가에게 보여줬더니 그 작업이 42Man-Years, 즉 1명의 사람이 한다면 42년 동안 작업했어야 할 분량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필자는 워드스타가 미래에도 계속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지배할 줄로만 알았다.그만큼 그 당시 소프트웨어 산업의 생리에 대해 무지했었고, 또 워드스타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 그만큼 감탄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워드퍼펙이 나오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가 나오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아래아 한글이 개발되면서 워드스타는 점차 잊혀졌지만 그래도 최근까지도 필자는 워드스타의 흔적아래 컴퓨터를 사용해 왔다.

워드스타에서 커서를 이동시키려면 CTRL 키와 함께 다른 키를 눌러야 했다. 이것을 ‘^’ 문자로 표시했는데 ^E라고 하면 CTRL 키와 함께 E 글쇠를 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E는 커서를 위로 이동시킬 때 쓰이고, ^X는 아래로, ^S는 왼쪽으로, ^D는 오른쪽으로 각각 커서를 이동시킨다.

키보드 상에서 보면 이 글쇠들은 한데 모여 다이아몬드 모양을 만든다. 이것은 바로 워드스타의 다이아몬드 자판 배열 방식이다. 이들 4개의 키를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키들도 조합을 이뤄 온갖 기능을 구현해 내도록 돼있다. ^F는 오른쪽 단어로, ^A는 왼쪽 단어로, 등등…

이런 커서 제어 방식은 최근까지도 다른 워드프로세서나 문서 작성 에디터에 그대로 적용돼 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DOS에 남아있는 Edit 프로그램이나 QBasic을 실행시켜보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워드스타의 유산이다.

오늘날 윈도우 운영체제가 일반화된 상황이 되면서 거의 사라진 채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지만 필자는 아직도 예전에 그처럼 익숙해졌던 이 워드스타의 제어키 배열이 손에 익어있다. 그래서 워드스타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1990년대 초반부터 사용했던 워드프로세서는 당연히 아래아 한글이었다. 그 당시 한글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솔루션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 혜성처럼 등장한 아래아 한글은 그래픽카드의 종류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폰트의 한글을 표현하고 또 여러 가지 유용한 기능들이 내장돼 있어 한글이라는 민족유산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까지도 갖게 해 줬다.

당시에도 워드스타를 사용하던 시절에 생각했던 것처럼 아래아 한글이 오랫동안 토종 소프트웨어의 대표로서 문서작성기 시장의 맹주로 자리할 것으로 한때나마 믿었고 적지 않게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찬진 씨를 비롯한 그 개발자들에 대해서도 경의심까지도 가졌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아래아 한글 2.5 전문가 버전을 22만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윈도우용 한글 3.0이 발표됐고 그 직후에 필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처럼 고객 서비스가 엉망인 회사의 제품을, 이런 버그 투성이인 채 출시된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할까… 필자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버그 목록을 한글과 컴퓨터 사에 보내고 나서 그 웹사이트에 올려진 답변은 “그 버그들은 모두 파악이 됐고, 현재 버전에서는 수정 계획이 없으며 향후 버전에서 개선될 예정임”이라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경악했다. 이것만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아래아 한글 대신에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필자의 주된 문서 작업 수단이 돼버렸다.

오늘날 아래아 한글에서 사용하던 기능키들을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거의 다 잊혀졌다. 하지만 필자의 컴퓨터 사용 습관을 아직껏 지배하고 있는 한 가지는 한글과 영문의 토글을 위해서 SHIFT 키와 함께 스페이스 키를 누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최초로 구현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소프트웨어 한글 구현 통신 프로그램인 인톡(Intalk)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필자의 한/영 전환 습관을 몸에 딱 붙여놓은 것은 바로 아래아 한글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영 전환 키가 따로 마련돼 있는 키보드를 쓸 때에도 항상 SHIFT와 스페이스 키를 누르는 전환 방식을 쓰고 있다. 이를 위해 윈도우의 키보드 드라이버는 항상 Type 3 기종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사실 필자는 영문 전용 키보드를 쓰고 있다).

아래아 한글은 과연 워드스타의 경우처럼 전설 속에 사라져갈 것인가. 필자는 가끔씩 아래아 한글로 회귀할까라고 자문을 하곤 한다. 하지만 예전의 그 실망과 배신감이 생각나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워드가 지배하고 있는 기업 문서 환경에서 그런 결정은 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최근엔 대주주인 메디슨이 보유주식을 외국에 팔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러 거의 외국 국적의 회사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 집에서나마 다시 아래아 한글을 써보고 싶어진다. 워디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탄생을 한 워디안에 아직껏 손을 대 보지는 않았다.

아무튼 필자의 선택과 관계없이 시장의 냉엄한 흐름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향하는 것 같다. 정말로 아래아 한글은 필자에게 SHIFT + SPACE라는 유산을 남겨놓은 채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워드스타의 유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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