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도 보고 뽕도 따는 해외 출장

By | 2003-08-29

필자의 첫 해외출장은 약 15년 전 일본의 어느 전시회에 참관해 당시 개발중이던 레이저 스캐너 장치 관련 제품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타 보게 될 비행기와 처음 발을 딛게 될 외국 땅이라는 사실 때문에 출장 전부터 상당히 기분이 들떴던 게 사실이었다.

또한 말도 안 통하는 곳에 혼자 출장을 가서 여러 가지 낯선 상황에 이런 저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무사히 3박4일의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작년말까지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지겹고 피곤해져서 제발 해외출장은 안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자주 왔다갔다할 상황이 되긴 했지만 오래 전의 첫 해외출장의 느낌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때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해외출장이 귀하고도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 용도가 굳이 해외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공적인 일이 아니고는 개인적으로는 물 건너 가 보기 어려운 일반 직원들에게 일종의 포상 휴가와 비슷한 역할도 했다. 매년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컴덱스나 CES같은 전시회가 개최되는 시기가 되면 한두 명씩 돌아가면서 그 쇼에 참관시키는 것도 직원들의 사기 부양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바로 위의 선배 사원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보고 내 차례는 언제가 되려나 하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는 직원들이 라스베가스에 가서 멋진 아이디어나 업계 동향의 분석을 만들어 오리라고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곳에서 업무 외적으로 관람했던 쇼나 관광지에서의 경험이 회식자리에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며칠 동안이나마 다른 세상을 보고 온 사원들의 자세나 시각이 적지 않게 변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비록 순수 업무를 위한 것만도 아닌 출장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출장은 분명히 긍정적인 결과를 주곤 했었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는 유럽 취재를 가면서 온 가족을 데려갔고, 또 업무보다는 가족의 관광을 우선으로 삼았고, 그 가족 여행에 들어간 비용을 청구하려고 영수증을 일일이 챙겼다는 어느 방송국 PD의 이야기가 화제 속에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일에 대해 워낙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어서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쪽 계통에서는 그런 행위가 관행처럼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로 그렇다면 단지 방송국 사람이 아닌 어느 대학교수가 동행하면서 그걸 목격했고 나중에 그것을 신문 지면에 올렸던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그게 아니라면 직무 유기 내지는 공금 유용쪽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해외출장을 가면서 가족을 동반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죄가 될까? 우리나라 회사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여러 해 전에 필자가 다녔던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해외출장 때 아내를 데려갔던 것이 최고경영자에게 알려져서 문책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다른 어느 회사에서도 그런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히 왜 문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출장 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상황에 가족과 노닥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출장 비용의 부정적인 처리를 우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외국 회사, 특히 필자가 경험했던 미국 회사들의 경우는 꽤 달랐다. 업무는 업무요, 사생활은 사생활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해서인지 몰라도 업무에 방해가 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HP에서 함께 근무하던 한 엔지니어는 일본 출장 때 아내가 직장에 휴가를 낸 후 함께 갈 것이라고 필자에게 자랑 삼아 얘기해 주기도 했다. 게다가 필자가 한국으로 출장을 온다고 했더니 매니저가 말하길 네 아내도 고향에 가보고 싶어 할텐데 함께 갈 계획이냐고 묻기도 했었다. 물론 회사에서 그 동반자들의 여비를 보태준다는 것은 아니다. 혜택을 보는 것은 호텔 방에 같이 묶어도 되고 렌터카를 이용하게 되므로 요금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것 정도였다. 직원이 낮에 업무를 볼 동안 배우자는 관광을 하든 쇼핑을 하든 따로 행동하였고 휴일에는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은 정도였다.

어디 한 번 생각해보자. 흔히 국내 회사 임직원들이 출장을 가게 되면 업무 외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가령 라스베가스의 컴덱스 쇼를 관람하러 출장을 간다고 해보자. 낮엔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전시회 참관을 할 테지만 밤 시간이나 휴일이 끼었다면 그 많고 많은 쇼 관람도 할 것이고 사방에 널려있는 슬롯 머신에 동전도 집어넣을 것이고 또 가까이 있는 후버댐도 구경할 것이며 시간만 좀더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그랜드 캐년에 다녀오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컴퓨터 관련 업체가 아주 많은 실리콘 밸리 지역에 출장을 간다고 해보자. 실제로 독자들 가운데 그쪽 출장을 경험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업무외 시간에 무엇을 했는가? 흔한 것이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금문교도 가보고, 캘리포니아 해변을 따라 이어진 1번 국도에서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는 등의 일이다.

또한 적지 않은 경우에 남자 임직원들끼리 모여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미첼 브라더스라는 이름의 빌딩에서 성인만 관람이 허용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동네에는 워낙 IT 업계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이 많은지라 그들을 만나 점심이나 저녁을 하기도 하고, 또 그들의 가이드 아래 이런 저런 구경거리를 찾아나서는 경우도 꽤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시간이 나지 않을 만큼 바쁘게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식으로 행동해도 회사에서는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다.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될 뿐, 개인 시간은 개인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가족을 동반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런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일반 직원에 있어 해외 출장을 일종의 특혜라고 보는 시각이 있어서 그렇진 않을까? 회사에서 베푼 기회를 이용해서 가족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간다는 식으로 은연중에 느껴져서일까?

앞에서 언급했던 첫번째 해외출장에 관한 일이었다. 귀국한 다음날 출근했더니 회사 총무가 뭐 사온 것 없냐고 물어왔다. 그 당시 거의 원칙처럼 돼있던 것은, 귀국하면서 여객기 안에서 양주 두 병 사와서 부서 회식 때 함께 마시고 또 출장자가 회사 밖에서 부서원들에게 점심을 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지식했던 필자는 업무상 일하러 갔을 뿐 무슨 호강하러 간 것도 아니고 놀다 온 것도 아니라고 반문하면서 그 두 가지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필자가 그 관습을 지키지 않은 이후로는 그것이 사라져버렸다는 점이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는 출장은 공적인 사안이므로 철저히 공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을 동반했기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다거나, 업무 회의 전날 밤에 술을 마시는 바람에 정작 출장의 목적인 회의에 혼미한 정신으로 들어온다거나 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또한 개인 관광이나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적지 않은 비용을 출장 비용 속에 정산 처리해서도 안될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식사 비용이나 렌터카를 몰고 친구 집에 간다든가 하는 식의 일이야 딱 갈라서 계산할 수 없으며 또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유연성을 가지고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한편 회사 입장에서는 또한 출장의 기회를 개인적으로 잘 활용하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모든 출장은 철저히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 가게 되는 것이지 호강하러 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것을 문제가 되지 않게 잘 활용하는 방안으로 가족을 데려가는 것은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으로인해 자신의 업무가 지장받는다면 그것은 철저히 금해야 할 것이다.

출장을 가서 일을 해결한 직후에 곧장 돌아와서 후속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현지에서 개인 비용으로 며칠 휴가를 더 쓴다고 하자. 가령 실리콘 밸리에 가서 2박 3일간의 업무를 수행하되 3일을 추가로 현지에서 머무르면서 그동안의 체류 비용을 개인이 부담한다고 하면 회사는 오히려 복지 차원에서 기꺼이 허용해야 할 게 아닐까. 물론 많은 경우에 너무 업무가 바빠서 그런 식으로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말이다.

외국 회사와 한국 회사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을 외국계 회사의 한국 지사를 보자. 그들은 순수 한국 기업들보다 훨씬 자주 해외 출장을 다니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해외출장 관행은 어떨까?

필자가 직접 겪어본 바로는 비교적 한국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아무리 회사의 업무 시스템이 외국처럼 만들어졌어도 그 틈새에는 다른 한국 기업의 양상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즉 공과 사의 구별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사에서 파견 나와 일했던 누군가의 의견을 들어보면, 마치 한국의 접대 및 회식 문화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 때문에 그런 비즈니스 관행을 묵인하는 것처럼, 출장에 있어서도 본사 차원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측면을 상당 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국제적인 기준에 맞게 바꿔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필자가 외국 기업의 예를 들고나니 너무 그쪽 기업 문화만 칭찬하는 것같은 인상이 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외국 기업에도 부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고 좋은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모범적인 기업의 제대로 된 시스템과 그것을 최대한 공정하게 준수하는 업무 문화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른바 세계화가 되면서 국제적으로 출장을 다니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번에 문제가 된 KBS 방송제작 PD의 경우와는 좀 다르겠지만, 우리 IT 업계에서도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부터라도 출장의 공적인 목적과 사적인 측면을 다시 정립하는 게 좋을 듯싶다.

업무상 해외출장의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도 있겠지만 점점 그럴 기회는 앞으로 많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출장은 회사로서는 적극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한 방법이고, 개인으로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와 함께 다른 좋은 결과도 낳게 된다면 일석이조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새로운 출장 문화를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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