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쟁이가 보는 ‘매트릭스 리로디드’

By | 2003-06-18

http://www.zdnet.co.kr/anchordesk/todays/hjkim/article.jsp?id=62260&forum=1

나비가 되어 꽃밭을 누비다가 문득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그게 과연 인간인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나비인데 잠깐 인간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장자(莊子)의 책인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몽 (胡蝶夢)’의 일화이다.

컴퓨터 과학의 발달과 함께 가상현실 기술이 소개되면서 흔히 인용되는 글이기도 한데, 최근에는 그 글이 원래 의도하는 도가사상적인 해석보다는 실제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동하리만큼 뛰어난 가상현실 기술을 묘사하는데 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에는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가상현실 세계와 함께 자주 비교 인용되고 있다.

매트릭스를 아주 잘 만든 영화라거나 혹은 작품성이 꽤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필자는 상당히 재미있게 봤다. 일제히 나서서 스크린쿼터제를 ‘사수’하자고 아우성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좀 미안스럽지만 최근까지 유행했던 조폭 영화와 요즘 한창인 에로틱 코미디 봤던 것을 다 합쳐도 매트릭스가 주는 재미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하겠다.

왜 재미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렇다. 컴퓨터 사이언스를 이해하는 감독이 만든 가상현실 세계의 묘사와 그에 결부된 상상력의 발휘, 그리고 종교의 또 다른 해석과 엄청난 액션 장면들이 재미있었다고 말이다.

어느 한 영화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다 재미있어 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영화 제작진을 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영화는 많지만 말이다.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또 신문매체를 읽어보면 매트릭스에 대한 평가 또한 양분돼 있다. 필자와 같이 ‘호평’을 내리는 사람도 있는 반면, 전편에 비해서도 졸작이라고 ‘혹평’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혹평의 이유는 대체로 몇 가지로 좁혀질 수 있는데 가장 흔한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내용’ 때문이다.

어느 신문의 평을 보면 ‘느닷없이 네오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날아다니더라’는 말을 하면서 수퍼맨 같은 만화 수준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또 다른 신문에서는 매트릭스의 내용의 상당부분이 물리적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걸 문제삼고 있다. 네오가 하늘을 주름잡으며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 격투 씬에서도 홍콩 무협영화에서처럼 공중에서 뜬 상태로 싸움을 벌인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영화 자체의 전체적인 흐름은 상당히 진지한 척 하면 그렇게 만들면 되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그런 평론가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컴퓨터 사이언스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이른바 문과 중심의 평론가들을 일컫는다. 컴퓨터로 타이핑하고 웹브라우징하고 메일을 쓸 줄 알지만, 그 안쪽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이상 생각을 하겠는가. 영화 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하는 장면은 오직 가상현실 속에서만 벌어졌을 뿐이고 현실로 돌아온 네오와 몰피어스, 트리니티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한계를 지니고 그것을 고민하는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점 때문에 필자는 매트릭스를 오히려 상당히 ‘현실적’인 영화로 본다.

비현실성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설득하고 싶은 것은, 일단 매트릭스의 세계로 들어간 상태에서는 모든 게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이다. 수백 명의 미스터 스미스도 만들어질 수 있고, 네오가 초고속으로 날아다닐 수도 있으며, 격투기 기법이나 오토바이 운전법을 전혀 모르다가도 그 코드(라이브러리라고 할 수 있다)를 다운로드받으면 즉시 전문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은 그게 컴퓨터 내부에서 벌어지는 버추얼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프로그램 코드이다.

또 어떤 사람은 현실과 매트릭스 공간 사이의 이동에 쓰이는 전송방식이 공중전화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재 전화선을 통한 일반 모뎀의 속도가 빨라야 56Kbps 이고 그걸 통해 ADSL같은 기술로 연결해봤자 엄청난 정보 이동이 필요한 인체의 전송은 꿈도 못꿀 속도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인식에서의 오류는 또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현실로 오인한 결과이다. 그 안에서의 전화기는 실제 전화가 아니고 단지 전화기라는 개체가 외부 현실 세계로 통하는 입출력 포트와 같은 것으로 사용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수백명의 미스터 스미스를 보고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면 그들은 미스터 스미스를 진짜 인간처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적부터 익숙한 손오공, 혹은 서유기를 생각해 보자. 머리털을 한 줌 뽑아 훅 날리면 수백 수천의 복제된 손오공들이 날뛰어댔다. 이 영화의 감독은 혹시 동양 고전 가운데 서유기까지 읽은 게 아닐까. 수없이 복제되는 스미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필자가 머리속에서 이해한 것은 한 개의 코드가 외형적으로는 수많은 인스턴스로 복수 실행되는 프로그램 구조였다.

키메이커의 등장에 대해서도 왜 그가 하필이면 키 작고 늙수그레하며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동양계 얼굴을 가졌느냐며 인종차별이니 뭐니 불평하지만 미국이 만든 미국 영화인 이상 그걸 갖고 시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하긴 네오의 역할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도 백인 혈통은 아니지 않는가. 그보다는 키메이커의 역할을 컴퓨터 내부에서의 보안 인증 프로그램같은 것에 비교해 가면서 해석해 보는 게 재미있을 것이다.

두 대의 트럭이 정면충돌하는 순간 네오가 마치 제트기와 같은 속도로 날아와 몰피어스와 키메이커를 구하는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됐다. 부딪힌 트럭은 앞부분부터 차근차근 주름이 접히며 쭈그러드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것 또한 현실세계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자동차를 개발하면서 슈퍼컴퓨터로 해보곤 하는 충돌 시뮬레이션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동차의 충돌전과 충돌후의 모습만 생각하지 않고 충돌 시점에 어떤 과정으로 파괴가 진행되는지 조금이라도 궁금한 적이 있다면 꽤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산쟁이로서의 시각이 아니라 종교적인 견지에서 볼 때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는 꺼리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싶다. 비록 그 이유 때문에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영화 속에 중심이 되는 종교는 상당부분 기독교적이긴 하지만 그리스 신화나 불교적인 요소도 적지 않게 보인다. 가장 키가 되는 것은 예언이 단지 프로그램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집트 정부가 염려하는 것은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이 기성종교의 의미에 대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모습의 종교를 매트릭스에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운명이 결정돼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매트릭스에서 프로그램된 운명을 말하는 것과 같다. 네오는 자신의 운명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운명’이라는 것 역시 프로그램 코드로 만들어진 것이었을 뿐이라는 내용은 참 재미있는 발상이며 컴퓨터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이해한 사람이 만든 영화답기도 하다.

영화 속의 가상 현실세계를 생각해 보면, 현재의 기술은 물론 어느 정도 먼 후세의 컴퓨터 기술로도 어렵겠지만, 최소한 이론적으로나마 그런 비슷한 컴퓨터 기술도 개발되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볼 때 컴퓨터의 메모리가 엄청나게 커지고 또 프로세서의 성능도 무한정 늘어난다면 말이다.

그리고 영화 내용에서처럼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고성능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연결한다면 네오같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에 칩입하여 마음대로 다른 코드를 유린하는 ‘불순한’ 코드가 존재할 수도 있고 미스터 스미스처럼 원래의 기능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인스턴스를 무한 복제하기도 하는 오류도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괜히 영화 하나를 두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오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경우에는 컴퓨터 사이언스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시각으로 볼 때 상당히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많지 않는 영화 중의 하나이기에 장황하게 서술해봤다. 나름대로 인간과 종교, 그리고 컴퓨터 기술의 미래상에 대해 좀더 깊은 고찰을 하는 데 자극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만큼 컴퓨터의 구조와 기능을 비교적 깊이 있게 잘 이해하면서 적절히 표현한 두 감독들에게 상장이라도 주고 싶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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