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부 장관과 어느 군인의 얼굴

By | 2003-03-13

필자가 살고 있는 이곳 양평은 서울과 비교적 가까운데다가 전방에 근접하지도 않은 곳이지만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군부대가 꽤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인지 훈련을 위해 이동하는 군부대 차량 행렬을 자주 보게 되는데, 어떤 경우는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상공을 지나 이동하기도 하고 탱크부대 이동 장면을 보기도 한다. 비록 퇴물 수준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엔지니어 딱지가 붙어서인지 기계 종류에는 유달리 관심이 깊은 필자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주에 본 것은 장갑차의 행렬이었다. 일단 헌병들이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또 그거겠지’라고 자연히 알게 되는데 이번 경우는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 경우와는 느낌이 달랐다. 캐터필러를 아스팔트 위로 굴리면서 굉음을 일으킨 대형 장갑 차량이 급커브를 틀며 필자의 차 바로 옆을 지나갈 때 눈에 가득 들어온 것은 장갑차가 아니라 그 안에 타고 있는 군인들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장갑차 밖으로 나와있는 얼굴은 장갑차 한 대에 대충 대여섯 명 정도씩이었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모두가 얼굴이 기름때에 찌들어 보였고 피로가 누적된듯해 보였다. 그때 무한궤도의 굉음을 들으면서 받은 느낌은 기계에 대한 호기심 충족이 아니었다. 바로 그 안에 타고 있던 얼굴에 대한 존경심과 일종의 미안함이었다.

필자는 병역 의무를 필했지만 현역 복무로서는 아니었다. 5년간의 기간산업체 연구요원 근무를 통한 특례보충역으로서 였다. 그래서 회사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실제로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심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특히 필자가 팀장으로 있으면서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은 팀원을 데리고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5년 뒤에 특례보충역 소집 해제가 되고, 그후 몇 년간 동원예비군 훈련도 그들과 함께 다니기도 했지만 실제 군복무를 한 사람들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는 습관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요즘처럼 어지간히 나이를 먹은 지경이 되어서야 좀 덜해졌다고나 할까.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애국하는 사람도 있고, 저런 식으로 애국하는 사람도 있다고들 말하곤 한다. 군인으로서 총을 메는 것도 애국이지만 기술인으로서 그 분야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것도 애국이라고 하는 의견도 비슷한 말이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있어서 군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필자의 부친처럼 25년 동안 군생활을 하신 분은 선택에 의한 직업을 가진 것이지만, 피끓는 청춘이라 할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군입대를 하는 것은 적성이나 취향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된 진대제씨의 경우도 다시 한 번 병역 의무에 대한 논란을 가져오고 있다. 몇 가지 다른 이유로 비판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함으로써 병역 의무를 회피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대통령이 적극적인 지지를 표시하여 그가 도중하차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것은 틀림없다.

기능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진대제씨의 정통부장관 입각은 아주 긍정적이라고 보여진다. 서울대전자공학과와 MIT, 그리고 스탠포드를 거친 우수한 학력만 가지고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삼성전자라는 회사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한국 전자산업의 위상을 상당히 높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학자라기보다는 하이테크 분야의 대기업을 지휘하는 경영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그의 능력과 경륜이 정통부 장관이라는 자리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에도 같은 삼성계열사인 삼성SDS의 사장이었던 남궁석씨가 그 자리에 앉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보다 오히려 이번 경우가 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애국심쪽을 살펴볼 때 진대제씨가 남보다 떨어진다고 단정지어 말하긴 어렵다. 미국에서도 앞날이 창창했을 사람이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심했고 또 그 당시로서는 불확실한 분야에서 일을 맡아 추진했다는 것을 반드시 애국심의 발로에서였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결과를 가지고 볼 때 그는 다른 어느 자칭 애국자에 못지않게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여했음이다. 매스컴의 보도에서처럼 50억원의 연봉과 70억원대의 스톡옵션도 포기하면서까지 장관직을 선택했다는 것으로 그의 애국심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아들이 미국인이다. 미국에 대해 애국심을 가져야 하는 미국 시민권을 가져서이다. 진대제씨는 분명히 한국인인데 그 아들이 미국인이라고 해서 정상적인 장관직 수행에 문제가 될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적지 않은 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 속에서는 불편한 심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장관이라는 자리는 단지 그 기능만 수행하는 기계적인 역할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민정서’라는 게 있어서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또 다른 쪽으로 생각이 미친다. 진대제씨가 물러난다고 하면 그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 것인가. 그 정도의 역량과 의욕을 가진 정통부 장관 후보가 또 있을까. 있다고 해 보자. 그 새로운 인물은 과연 부동산 투자를 통해 큰 이익을 본 적도 없고 자식이 미국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대기업을 운영하면서 알게 모르게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르지도 않은 게 확실할까. 그러고 보면 결국 몇 번씩 발탁과 사퇴를 반복해야 겨우 엇비슷한 인물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임명한 사람이나 임명받은 사람 모두에게 진정 골치 아픈 일이긴 하겠지만 결론으로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욕할 것은 욕하고 흉볼 것은 흉을 보자. 하지만 정보통신부의 일을 맡기자. 그리고 과연 그가 어떻게 일을 해 나가는지 살펴보자. 그럼으로써 그가 행한 오류의 무게를 어느 정도 줄이도록 만들자. 결코 총합이 플러스가 되진 않을테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진대제씨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있다. 그 삼성전자에서 이룩한 것만큼만 해 달라고. 그러면서 며칠 전 장갑차를 몰고 가던 그 젊은이들의 얼굴을 한 번 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진다. 자신의 아들 얼굴과 오버랩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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