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하는 장사가 아니다

By | 2002-11-21

사람들은 흔히 장사중엔 “먹는 장사가 최고”라고들 한다. 그 말은 누구나 먹는 장사를 시작하면 성공한다는 게 아니고, 일단 자리잡은 뒤에는 경기의 여파를 덜 받는다는 의미로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세상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점들도 많다. 우리 주위에도 3대에 걸쳐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 식으로 광고하는 음식점들이 심심치않게 눈에 띈다. 오직 한 가지 품목으로 그렇게 굳건히 아성을 지키는 부류이다.

그런가 하면 해가 바뀌기 무섭게 주요 종목을 바꾸는 음식점도 상당히 많다. 유행따라 맛도 변한다는 것인데, 가령 솥뚜껑 삼겹살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솥뚜껑 삼겹살 전문 음식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와인 바비큐가 유행하면서는 또 한 번 종목을 바꾸는 식으로 장사를 한다. 여러 해에 걸쳐 쌓아온 자신만의 맛도 없이 제품을 만들어 그저 유행이라는 것을 좇아가는 소비자들의 심리에 편승하거나 그걸 부추기는 먹거리 장사인 셈이다.

하이테크 산업계에도 유행따라 제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면 MP3 플레이어를 만드는 업체들을 들 수 있는데, 재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MP3 플레이어 전문업체라고 자처하며 주 제품라인을 MP3 플레이어로 내세우는 업체들이 자그마치 100개 이상 있었다. 혹자는 그 수가 200여 개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실제로 영업 활동을 하는 업체의 수는 약 20개 정도로 줄었다.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통정리가 된 결과이다.

몇년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MP3 플레이어를 맨 처음 개발해내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펌웨어가 전무한 상태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발해낸 제품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MP3 플레이어가 큰 성공을 거둔 후부터는 그 개발이란 것의 양상이 달라졌다. 최초에 마이크로나스(Micronas)라는 회사에서만 최소 기능의 MP3 칩이 판매됐는데, 돈 냄새를 맡은 다른 반도체 업체들이 그 시장에 뛰어들었다.

시러스, TI, STM, 모토롤라, 인텔 등과 같은 대형 업체들이 서로 앞다투어 이 디지털오디오 기술을 지원하는 다양한 칩을 개발·판매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기능이 내장된 펌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제공해 주었다.

대기업들도 MP3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런 상황이 되자 MP3 플레이어를 새로 개발해 내는 것에 있어서 하드웨어와 펌웨어를 만드는 것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고 이젠 케이스 외형 디자인과 유저 인터페이스 개발이 신제품 개발의 큰 관건이 돼버렸다.

결국 비디오 칩을 구입하면 PCB 보드의 레퍼런스 디자인 도면까지 다 제공해 주는 바람에 많은 회사들이 서로 똑같이 생긴 비디오 카드를 너도나도 만들었던 것처럼, MP3 플레이어도 역시 아무나 하는 장사가 돼버린 것이다.

한창 벤처 창업이 많던 시절, 시중에 창업 자금이 넘쳐 나던 그 시절에는, MP3라는 명칭이 사람들에게 첨단의 이미지를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MP3 플레이어 모델을 하나 만들어 놓고선 ‘우리의 기술력이 이렇게 좋네’라면서 자랑할 수 있었던 소재가 되었나 보다.

그 덕분에 투자받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MP3는 그런 식으로 이름값을 해주질 못한다. 더 이상 첨단 이미지를 주지 못하고 그저 MP3 플레이어의 종주국이다라는 식으로 내세울 수 있을 뿐, 이미 시장의 주도권이 중국 경제권(대만, 홍콩, 중국 본토)으로 넘어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아직은 우리나라의 MP3 업체들이 선방하고 있는 편이지만 자가 브랜드 이미지 제고와 모델의 고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곧 일본업체들의 고급모델과 중국업체들의 중저가 모델에 치여서 힘든 시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위에서 거론한 MP3 플레이어를 생각나게 하는 소식이 들리곤 한다. 바로 DVR (Digital Video Recorder)이라는 제품이다. 최근의 소식을 들으니 DVR을 주 종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업체가 드디어 100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MP3 종주국에 이어 DVR 종주국이라고 알려지면서 업체들도 우후죽순 늘어난 것이다.

아하! 이 상황에서 어찌 MP3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변의 아는 사람들을 봐도 DVR 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 벌써 3명이다. 그들 모두 ‘내 회사에는 남이 못가진 기술이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DVR이 하이테크 시대에서 벤처회사를 운영하며 돋보이기 위한 키워드라고 믿고서 도저히 남들과 차별화할 수 없는데도 DVR 개발을 강행하고 있기도 하다. 9.11 테러 이후 DVR 업체의 주가가 뛰고, 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그에게 유혹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업체 수가 많아지면서 벌어질 수 있는 현상을 꼽아보면 인력 빼가기, 과당 경쟁, 상호 비방, 저가 입찰, OEM 수출 의존의 심화, 외형 부풀리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미 MP3 중흥기에 다 거쳤던 현상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 저기서 조금씩 그런 문제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DVR이 ‘아무나 하는 장사’는 아닌 게 사실이다. 광학, 영상처리, 네트워킹 기술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술이 복합적으로 필요하고 MP3처럼 칩 몇 개로 구현되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중저가 시장에선 대만이나 중국이 강력하게 일어서고 있는 상황이고, 9.11 테러 이후로 보안 시장이 커지면서 점점 MP3 경우와 같은 양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MP3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MP3 플레이어가 그처럼 하이테크의 키워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활짝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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