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벤처에게 무엇인가?

By | 2002-01-24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말은 최소한 10년이 그렇게 긴 세월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혹은 강산이 변하려면 적어도 1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엔 하루 아침에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일이 너무도 많이 목격되곤 한다. 널뛰기 증시의 주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참 잘 나가던 대기업도 소리 소문없이 갑자기 망해버리는 세상이니 말이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미국의 대형 기업인 엔론(Enron)사가 파산하는 것을 보고 나니, 역시 기업의 흥망성쇠에는 이 속담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대기업이 그럴진데, 벤처 회사의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수없이 세워졌다가 문을 닫곤 하는 것이 벤처 회사이므로, 그런 부침을 보는 것은 자연이 계절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요즘 한창 신문 지상과 방송을 장식하고 있는 패스21이라는 회사도 다른 수많은 업체들과 다름없는 벤처 회사였다. 외적으로 보자면 꽤 짜임새있고 기술력도 충분하며, 그야말로 미래가 창창한 그런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윤태식씨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언론 매체도 패스21을 긍정적인 눈으로 보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보도하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수지킴 사건이 실상은 이러이러한 흑막이 있었다고 보도되면서, 모든 상황은 달라졌다. 이 회사에 대한 언론의 시각과 평가는 180도 달라져 버렸다. 어느 방송에서는 패스21의 실체를 보여준다는 보도를 통해 그 회사는 거의 껍데기에 불과하며 별다른 기술도 없다고까지 평가절하했다. 그 방송뿐만이 아니다.

이제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입을 맞춰 어떻게 하면 패스21이 별 볼일없는 회사인지 증명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보도하고자 하는 취지는 정해져 있고, 남은 일은 그걸 입증하기 위해 말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필자는 패스21이라는 회사에 대해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겨우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알게 됐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패스21이 정말 그렇게 형편없는 회사였다면, 언론에서는 왜 이전에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까? 예전에도 방송이나 신문에 그 회사가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칭찬 일색이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하늘과 땅만큼 달라지게 됐는가? 그 회사 내부에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정작 중요한 사실은, 패스21이 회사와 기술력 그 자체만으로 볼 때 그렇게 말도 안되는 회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될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사실 윤태식씨가 주식을 정치인이나 기자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전반적으로 볼 때 남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벤처업체들도 많이 저질렀던 거의 관행과 같은 행위였기 때문이다. 1∼2년 전 또는 그 이전을 생각해 보면, 솔직히 그런 주식 기부 행위는 기업을 하는 사장으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었던 어떤 운영 방식이라고까지로 보여졌다.

수많은 기자들과 정치인, 연예인들과 인맥을 맺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던 사람들에 대해 ‘수완이 좋아서 회사를 발전시킨 인물’로 보았지 어디 ‘부적절한 방법을 사용한 인물’로 보았던가? 오히려 그렇게라도 인맥을 만들지 않은 벤처 사장에 대해서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몰기까지 하는 분위기였다. 또 연예인 하나 끌여들여서 홍보담당 타이틀 붙여서 광고에 내보낸 것이 다 출연료 대신 주식을 주면서 했던 것 아니었나? 그러던 것이 이번에 확 뒤집혀버린 것이다.

이번 사건이 벤처 업계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는 차라리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본다. 진짜 실력과 열정과 성실함을 무기로 정진해 온 벤처인들이 최소한 당분간은 투자받음에 있어서 ‘사이비’ 벤처인들보다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이 흐릿해져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 올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많이 약해질 것이다. 전반적으로 올바른 길로 가는 과정이다.

이번 사건으로 다시금 확인한 것은 일부 신문과 방송같은 미디어의 횡포이다. 예전에도 자주 그들이 잘못 보도한 내용 때문에 어려운 지경에 빠진 벤처가 많았지만 이번처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차라리 옐로우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스포츠 신문들처럼 확실히 ‘믿거나 말거나’ 자세를 취하면 상전이다.

이번 사건에서 그들은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윤태식씨에게 주식받은 적이 없으니까”, 혹은 “난 안 들켰으니까”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긴 적지 않은 벤처 기업들도 이른바 ‘언론 플레이’라는 것을 통해 사실 이상으로 부풀리기를 했던 게 사실이고 보면 이건 전혀 모르는 남에게서 뒤통수 맞은 것만도 아닐 수 있다. 이번 주만 해도 필자가 분명히 ‘이건 아닌데…’라고 느끼면서 봤던 벤처업체 기사도 2건이나 된다.

칼의 양날처럼 벤처의 구세주가 될 수도 있고 파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미디어의 양면성이다. 누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언론은 그 칼을 어떻게 쓰는 것이 올바르게 쓰는 것인지를 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아예 칼을 칼집에 넣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몇 몰지각한 벤처 기업들도 언론을 통한 자화자찬 혹은 뻥튀기에 신경쓰기보다는 실력을 배양하는데 좀더 신경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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