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Way의 갈림길

By | 2001-11-15

미국 영화를 보면 직장에서 해고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상사에게 대들었다가 “You’re fired!”라는 말을 한마디 듣고 나면, 그 즉시 자기 책상에 가서 박스에 개인 물건들을 정리해서 나가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그렇게 싸우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회사 사정이 어려워 오늘 날짜로 해고하겠다”라는 식의 통보를 받으면 거의 당일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필자는 미국에 처음 가서 일할 당시에 그렇게 해고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그런 것은 흔한 광경이라고들 했다. 보안 유지가 필요한 업무를 했던 사람의 경우에는 아예 짐을 싸는 동안에도 옆에 경비원이 붙어 감시하고 나중에 회사 문밖까지 엄중히 에스코트를 하기도 한단다.

최근 경기가 안좋아지면서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자신이 해고됐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에 로그인을 하려 했더니 존재하지 않는 ID라는 메시지가 나타나서 자신이 그날로 해고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필자는 미국 회사에서는 다들 그런 식으로 해고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90년대 후반기 휴렛팩커드(HP)에 입사한 뒤에 발견한 것은 오히려 그런 것과는 정반대의 기업 문화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해당 부문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질 경우, 회사는 우선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고 한동안 시간을 준다. 그는 그 기간 동안 같은 건물 내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부서가 있는지 알아보고, 적절한 자리를 발견했을 경우 자신이 일할 수 있고 또 일할 의사가 있는 직무인지 확인한 후에 해당 부서장에게 지원한다. 마치 신규 채용처럼 면접이 이뤄지고 모든 조건이 대체로 충족되면 부서간의 전배가 이뤄지는 것으로 끝난다.

만약 자신에게 적당하거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직무가 인근에 없으면 점차 지역을 넓혀가면서 원한다면 전세계 HP 사업장을 대상으로 똑같은 식으로 자신의 갈 곳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 모든 사업장의 인력 충원 계획은 지원 자격과 업무 조건이 상세히 서술된 채 인트라넷 서버에 올려져 있으므로 검색은 완벽히 이뤄질 수 있다.

그래도 자리가 없다면 흔히 회사를 나가기도 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내부에서 찾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회사에선 임의로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직무에 그를 배치하기도 하는데, 설사 전에 받던 것보다 낮은 호봉을 받아야 하는 직무일지라도 단번에 그것을 깎지는 않는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 배치된 업무를 자신이 제대로 해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직무 배치를 회사에 요청할 수 있고 그럼 그때부터 재배치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된다. 이러면서 몇 달은 아무 일없이 지나가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1년 가까이 경과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필자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기업 문화였음은 물론, 일종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회사 경영 방법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항상 튀어나오곤 하는 것이 HP Way, 즉 HP식 경영 철학이다. 앞에서 예를 든 인사 방식도 HP Way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HP Way는 휴렛팩커드가 실리콘밸리 최초의 벤처 기업으로 설립됐을 때부터 맥을 이어 온 인본주의 경영 철학이다. 이는 HP 웹페이지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자율적이고도 창의적인 조직 풍토를 중요시하며 사원들과 고객들을 소중히 관리하면서 기업을 운영한다’는 회사의 경영 방식이다.

그 때문에 회사가 처음 설립된 1930년대부터 작년까지, HP는 다른 미국 기업에서 흔히 행하곤 하는 레이오프(Layoff), 즉 일자리가 모자라서 다수의 직원들을 강제로 해고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없었다. 1980년대에 극심한 불황기를 맞아 다른 모든 회사들이 레이오프를 단행했을 때, HP는 전 직원의 동의를 얻어서 모든 사람의 급여를 10% 삭감함으로써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필자가 처음 HP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기존 사원중 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주는 것을 들었는데 필자는 그에게서 HP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다국적 거대기업으로 성장했고, 항상 건전한 기업으로 손꼽혀 왔던 HP가 만들어지기까지는 HP Way가 그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 HP Way에 대한 직원들의 자부심과 안정감, 그리고 충성심은 1999년에 칼리 피오리나가 회장으로 영입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들어서는 레이오프가 시작돼 자그마치 1만명이 넘는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이미 발표된 컴팩과의 합병이 완전히 성사되면 두 회사를 통틀어 1만 5000명이 더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분석까지 들리고 있다. 이제 HP 직원들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상황에 이르러 혼돈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강한 불만을 여기저기서 표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컴팩과의 합병에 대해 창업자의 자손들인 휴렛과 팩커드 가족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반대 소식 덕분에 주식 시장에선 HP의 주가가 올랐고, 반대로 컴팩은 하락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녀에 관한 온갖 안좋은 소문이 나돌기도 한다. 프랑스 지사를 방문했을 때 헬리콥터 착륙을 위해 지사에 있던 나무를 베어냈던 일이 과장된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고, 심지어는 출장가는 곳마다 개인 전속 미용사를 데리고 다닌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HP 사람들 내부에서 떠돌기까지 하고 있다.

어찌 보면 HP에서 뼈가 굵은 수많은 직원 및 창업자 가족들과 HP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 성장하여 영입된 칼리 피오리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HP의 정통성은 가끔은 지나친 ‘온정주의’라고 외부에서 표현하기도 하는데, 내부의 그런 분위기 속에 커온 인물이 회장이 됐다면 그녀처럼 칼질을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고 이제 회사의 경영철학도 바뀔 때가 됐기 때문에 과감히 직원들을 내보낼 수 있는 외부 인물이 총대를 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HP의 아성이 험한 시절을 맞아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온 세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HP가 필자의 옛 직장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HP의 움직임은 IT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컴팩과의 합병과 직원의 추가 해고, 그리고 그 이후의 행보에 관심이 기울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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