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과 끈기

By | 2010-02-09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주 어렸던 시절에, 코흘리개를 간신히 벗어나서 교실 책상에 앉아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내용을 연필로 공책에 받아적던 그 시절에는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비롯한 여러 어린 학생들의 가치관으로 그대로 머리속에 자리잡곤 했던 것 같다. 듣는 내용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말투와 행동과 심지어는 표정까지도 우리가 자라가는 모습에 단서를 주었을 것이다. 물론 자라가면서 그렇게 배웠던 요소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도 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만들어 현재의 모습이 되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오늘날 성인이 된 많은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몇년간 듣고 배웠던 것들은 아직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좋은 말들도 적지 않았을텐데,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가르침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있었을텐데, 지금 내머리를 뒤져서 기억을 떠올려보면 도대체 긍정적인 것들이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정말로 가슴 속에 뿌리깊게 박혀서 상처를 입혔던 말들이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의 대부분이다. 학생들 개개인을 아프게 했던 말들도 참 많았다. 저렇게까지 마음 속이 뒤틀렸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가하면 그 지역사회를, 혹은 국가와 민족 전체를 싸잡아 욕하는 것도 적지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던 같은데 그때 담임교사가 매를 때리면서 하던 말들이 있었다. “조선놈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라고 내뱉으며 몽둥이질을 했다. “엽전들은 어쩔 수 없다”라고도 했다. 그건 어린 우리들 개인들의 자의식에는 물론 민족적인 모멸감까지 들게 했던 경우다.

중학교 시절엔 그나마 좀 더 개인적인 쪽으로 범위는 축소되면서도 훨씬 더 폭력적인 언어가 난무했다. 예를 들면 담임이 “내가 오늘 너 막 패고서 개값 물어주고 말겠다”라고도 했다. 고등학교 때엔 “오늘 너 병신만들고 내가 백묵장수 그만두면 돼”라고도 했다. 그런 말의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망가뜨리는 심리가 엿보일정도로 폭력적인 언행이었다. 요즘에야 교사가 최고 인기 직종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20 여년 전만해도 40개 직업으로 설문조사했을때 교직이 꼴찌에서 두세번째에 불과했던 것은 그런  기억들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교사들이 많았다. 물론 좋은 분들도 없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런 언행을 당하면서 받았던 폭력의 기억은 시간이 가면서 가물가물해졌고 그 육체적인 고통은 그보다 더 일찍 잊혀졌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후유증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그런 말들이 기억에 무수히 남아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들을 내 가치관에서 허용하거나 채택하고 있진 않지만 무의식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갑자기 깊은 곳에서 다시 나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의 현재의 정신세계도 알게 모르게, 많건 적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으로건 영향을 입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억나는 좋은 교훈도 없는게 아니다. 중학교때 체육선생님이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간단한 운동, 최소한 국민체조 정도라도 쉬지 않고 하면 평생 건강하게 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던 것은 분명히 좋은 가르침이다. 이 말과 함께 우리 민족의 특징은 “은근과 끈기”라고 배웠던 것도 성인이 되고 한참 뒤에까지 계속 미덕으로 믿어왔던 말이기도 하다. “은근과 끈기”가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 책을 실제로 읽어보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게 우리 민족의 특징이자 장점이고 계속 지켜나가야할 전통이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회적으로도 현재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은근과 끈기”가 우리의 민족정신이라고 인식되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요즘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한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특징을 “은근과 끈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일까하는 강한 의문이 생긴다. 여러나라 사람들과 함께 놓고 비교해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하는 모습이나 행동하는 방법이 상당히 급하고 직설적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데 말이다. 심지어는 경솔하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직선적인 성향이다. 절대로 다른 민족보다 더 “은근”한 성향을 가졌다고 하긴 어렵다. 그건 “끈기”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한국인들의 조급증은 가히 병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왜 “끈기”가 대표적인 성격이라고 하는가. “빨리빨리”를 입에 붙이고 사는 우리들을 그처럼 끈기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걸까.

“은근과 끈기”를 민족정신이라고 내세울 생각을 한 사람은 스스로 얼마나 민족적인 측면에서 내세울 것 없은 궁색함을 느꼈기에 그런 말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나라가 세계의 다른나라들보다 정말 초라하기 이를데 없고 또 내세울 것도 없는 상황에서는 어쩌면 그렇게라도 말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전혀 맞는 말이 아니다.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지금의 우리는 “은근과 끈기”를 뿌리로 삼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전혀 그것이 그리 현실에 썩 맞아떨어지는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은근과 끈기”라는 주장에 세뇌되어있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내가 어린 시절에 듣고 배웠던 이른바 민족정신이나 미풍양속 등등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 내가 그것을 여전히 옳다고 보고 있는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도 전반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청년들도 그렇고 중장년층에게도 그렇고, 우리는 과연 학교에서 사회에서 무엇을 배운걸일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던 우리 국토와 민족에게 어떤 사상과 문화와 전통들이 계속 변하지 않은채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정신적으로 아무것도 배우지도 못했고 문화적으로 아무것도 물려받지도 못한게 아닐까. 그저 공허감이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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