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은 어두웠지만 기억은 소중하다

By | 2009-08-30

사용자 삽입 이미지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그 당시 대전에서는 내 학년이 고교평준화, 이른바 뺑뺑이 1회였다. 그 전까진 고교입시 시험을 통해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자신이 가고자하는 학교를 지원해야했고 그 학교로 가서 그 학교만의 시험을 봐야했다. 나는 당시에 공부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추첨제가 아닌 입시제도에서도 그 당시 그 지역 최고 명문이라는 대전고등학교는 어차피 입학원서도 내지도 못했을게 분명했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되면서 각 학교별로 골고루 학생들이 배분되고 학교 별로 학생들의 수준이 많이 차이가 나지 않게되면서 난 일종의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치룬 대입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바로 전 해인 81학번부터 본고사 폐지가 되었고 본고사 없이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대학을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본고사까지 감당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입시라는 제도하에서 행운을 두 번 얻은 셈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나는 중2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약 5년간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입시의 고민때문도 아니었고 이성 문제도 아니었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숨막히는 교육 체계도 작지 않은 문제로 작용했지만, 최대 문제는 스스로 만들어낸 내 마음속의 병이었다. 너무 일찍 정신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생긴 현실과의 불균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신병원엔 가본 적이 없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진짜 정신병이지 않았나 싶다. 어떤 시기에는 길을 가다보면 갑자기 도로에서 달리던 차 중의 한대가 내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나를 칠 것 같다는 느낌, 그것이 나중엔 거의 확신으로 변하던 때도 있었다. 시내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내 눈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나를 잡으러 온 사람이 분명하다는 생각까지 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길바닥에 그어진 금이나 보도블럭끼리의 경계를 밟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곤 했던 것은 거의 일상적인 습관이 될 정도였다.

워낙에 예민한 신경에 소화기관까지 더욱 민감해졌는지 정상적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소화시키고 기분좋게 배설해본 것이 한 해에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던 경우도 있었다. 거의 매일 소화불량과 씨름하며 살았더니 살이 빠질대로 빠졌고 이게 또다시 정신에 다시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이 되어버렸다. 그 나이에 벌써 머리속에선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스무살을 넘어서는 미래가 있으리라는 생각과 그 후의 희망에 대해선 꿈꿀 자신조차도 없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장례를 치루게 될까. 죽을 때 느낌은 어떨까. 과연 누가 슬퍼하긴할까… 그또래의 친구들은 꿈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또 거의 양푼으로 밥을 먹으며 한창 성장하던 시기였는데 난 하루에 먹는 밥의 양을 다 합쳐도 한그릇 밖에 안 됐다. 뱃속에서 받아들이질 않았던 것이다.

육식처럼 위장에 조금이라도 부담이 되는 것은 더욱 소화시키지 못하여서 많은 경우에 반찬없이 거의 밥만 몇 수저 먹기도 했다. 이처럼 허구한날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 하다가는 또 다른 날들은 머리속의 온갖 상념 때문에 괴로워하는 생활의 나날들이었고 결국 체중이 57킬로그램까지로 줄어버렸다. 중학교 1, 2 학년 시절에는 학급에서 팔씨름을 하면 나를 이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근력도 좋고 건강했지만 일단 몸과 마음에서 균형이 무너진 나는 무작정 추락하기 시작했다. 약 70명의 한반 인원에서 난 뒤에서 두세번째의 그 나이엔 좀 큰 키였는데 중학교 2학년때부터 갑자기 몸이 이상하기 시작하더니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 벌써 거의 크지를 못하게 됐다. 그래서 고등학교땐 키가 아예 자라지 못했다. 내가 일찍 육체적인 성징이 나타난 이유도 있을 수있지만,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겐 먹는 만큼 크는게 당연한 일인데, 일단 음식의 소화흡수가 안 되면서는 대책이 없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가봐도 원인을 모르겠다거나 대부분은 신경성 소화불량이라고 판에 박은 진단만 내놨다. 요즘과는 의료 수준과 서비스가 비교도 안되는 30년 전 고등학생 시절에 벌써 위 내시경과 대장조형술 촬영까지 다 해보기도 했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용한 민간요법이라며 나에게 익모초 물도 먹이고 돼지쓸개즙같은, 냄새만 맡아도 사흘전 먹은 것까지 다 토하고 싶어지는 것들도 억지로 먹이곤 했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내가 앓고 있던 것은 육체의 병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병이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론 정상인척 했지만 내 마음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밤에 잠을 자려고 이불 위에 누우면 갈비뼈 아래의 뱃가죽은 배꼽과 함께 아래로 푹 꺼져버리는데 뱃속에도 지방성분이 거의 없어보였다. 그당시에 난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암담한 생활을 하면서 점점 밑으로만 빠져들던 내가 추락을 멈출 수 있게 된 것은 대학입시였다. 원래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까지도 대학을 간다는 것에 대해선 전혀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2학기에 전국 모의고사라는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이건 전국의 많은 같은 학년 학생들이 동일한 입시 모의고사를 치루는 것으로서 전국 석차까지 볼 수 있는 시험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같은 학년 이과 계열 학생들이 300 여명쯤 됐는데 그 속에서 평소의 내 석차는 200등 가까이 내려가곤 했다. 등수로도 말할 가치도 없는 정도였지만 그만큼 나는 학교 생활도, 공부도, 시험도, 졸업 후의 미래도 머리 속에 들어가 있지를 않았다. 단지 내가 공부를 안해도 잘 할수 있었던 영어 과목만 관심을 가졌고 성적도 최상위권이었을 뿐이다.

그게 무엇이라는 사전지식도 없이 치루고난 뒤에 한참 뒤에 전국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았다. 자신의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교와 학과가 어디인지 보여주는 합격 예상표가 있어서 대조를 해봐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 당연히 불가능. 대전에 있는 4년대 대학교, 이것도 불가능. 그렇다면 2년제 전문대학. 합격권에 있는 학교보다 가지 못하는 학교가 더 많을만큼 내 시험성적은 형편없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 모의 고사는 나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공부에, 대학에, 그리고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고 희망도 없던 내게 동기부여를 해 준 사건이었다.

2학년 2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겨울 방학동안 난 영어와 수학의 두 과목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전엔 공부란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이미 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누나에게 물었더니 영어는 성문 종합영어, 수학은 수학정석으로 공부하라며 자신이 공부했던 책을 넘겨줬다. 한눈에도 그 두 책들은 너무도 두꺼워보였다. 너무 부담스러운 마음에 그것들보다 절반도 안 되는 두께의 다른 교재를 찾았는데 그것들은 기본영어, 그리고 해법수학이었다. 이 두책을 한 과목에 하루 한시간 정도씩 할애해 가면서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기본영어는 쉽게 읽어 나갔고 문법까지 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애초에 수학에 약했던 나에겐 해법수학 수준도 어려웠다. 기억도 잘 안 나지만 겨우 절반을 간신히 넘겼던 것 같다.

3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다른 과목의 수업에도 조금씩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물리, 생물, 화학, 기술, 공업, 기술, 국사, 수학2… 한달쯤 뒤에 치룬 전교 모의고사 결과는 이과 계열에서 20 등, 학급내에서 5등으로 올라가는 비약적인 결과를 보였다. 그래도 난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담담해했다. 그때부터 내 목표는 전교 5등이었고 가고자 하는 대학교와 학과도 마음 속에 정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공부하는 자세는 치열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애초부터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과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아침 8시까지 등교했고 저녁엔 7시에 집에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전교 50등 이내의 학생들에겐 도서관의 개인박스에 집어넣고 매일 밤 10시까지 입시공부를 시켰지만, 난 담임 선생님에게 집에서 공부하겠다고 했고 의외로 한마디로 승낙받았다. 그래서 50명 중에 나 혼자만 7시 정시 귀가를 했다. 집에 오면 8시까지 저녁식사를 하고 9시까지 책보고 기타치고 놀다가 TV의 9시뉴스를 30분쯤 시청하고 나서 한시간 내지 한시간 반 정도 내가 정한 공부를 한 다음 11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은 무조건 공부도 쉬는 날이었고 평일과 마찬가지로 저녁때에만 한 두 시간 공부했다.

나에게는 어차피 남들처럼 공부할만한 정신력도 체력도 없었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었고 단지 학교에서 보내는 수업시간에만 공부했다. 수업내용이 맘에 안들면 내가 다른 과목을 정해서 수업을 무시하고 그 책을 읽었다. 다행히 고3시절의 특수성과, 공부 잘하는 애라는 예외성은 그런걸 상당부분 허용해줬다. 그래도 나는 학교에서 너무 외롭고 적막했다. 수십명이 좁은 한 공간에 앉아서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곳에선 나는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아침 8시까지 등교한 뒤에도 나 혼자 교실밖에 나와서 9시까지 멍청히 앉아있을 때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건강이었다. 매달 치루는 모의 고사에서 나는 이과 전체에서 10등과 20등 사이를 오르내렸다. 욕심을 내서 공부를 좀 할라치면 몸이 말을 안듣고 앙탈을 부리는 바람에 앓아누웠다. 그러면 등수는 여러 단계 떨어졌고 다시 회복을 하면 10등 가까이 올라갔다. 그런 것을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거듭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름방학쯤 되면서 의기소침해진 나는 자퇴해서 검정고시를 볼까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어차피 1, 2 학년때의 형편없는 성적으로 인해 졸업시의 내신성적이 너무도 나쁠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최종 입시 점수의 하락치가 너무 클 것이었다. 게다가 몸 상태까지 계속 안 좋으면서는 제대로 시험을 보기나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퇴라는 급진적인 선택을 할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냥 가기로 했다. 더 이상 모의고사 등수에 연연해하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입시공부를 해나갔다. 최악의 경우 재수를 하면서 1년간 집에서 공부하면 그만이라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집에서 공부 하는 것이 훨씬 맘이 편했고 효율도 높았다. 전체 공부 시간의 절반은 수학에 할애했지만 내 머리구조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과는 영 다른 것 같았다. 시험때마다 점수가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난 전자공학과를 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 현실감각은 꽝이었나보다. 나는 대학교에서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하고 싶은 어린애다운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3학년 2학기가 거의 지나가고 대입시험을 치뤘다. 시험날g엔 내가 시험을 아주 잘 볼 관상이라고 오해했는지 같은 교실에 배정된 웬 바바리코트 입은 긴머리의 재수생이 자기를 꼭 도와달라고 내 자리로 찾아왔다. 답안지를 자신이 볼 수 있게 책상 위의 옆쪽으로 치우치게 놓아달라고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시험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지만 나는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국어 영어는 거의 다 맞았던 것 같았지만, 수학 시험은 너무도 어려워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번호를 찍었다. 시험이 끝나고 맞춰본 수학성적은 50점 만점에 28점이었다. 원래 수학을 잘했던 동급생들은 그렇게 어려운 수학문제도 거의 다 맞췄다고 말하는 걸 보니 맘이 불편했다. 나는 번호 찍는 것도 제대로 못했나보다 싶어 한심해 했지만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했다. 어차피 난 재수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되던 날 무덤덤히 바라본 성적표의 점수는 썩 좋진 않았지만 예상했던만큼 나쁘지도 않았다. 재수는 안 해도 되려나 싶었는데  웃긴 것이 다른 학생들 성적이 상당히 나빴던 것이었다. 신문에서 발표된 전국 성적은 사상 최저 점수 분포였다. 내 점수는 서울대로 따질 때 상당수 공학계열이나 순수과학, 이과계통 교육학과 등을 지원할 수 있는 점수였지만 내가 가고팠던 학과, 가령 전자공학과, 제어계측학과 등의 관심분야와는 거리가 먼 점수였다. 내 내신등급은 5등급으로 상당히 나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때는 문과대 응시도 생각해봤지만 대학생활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사실 나로선 선택에 있어서 골치 아픈 문제는 없었다. 내신 성적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내가 가고자 했던 대학교의 관심 학과에는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학교에서는 서울대의 다른 학과 진학을 권했다. 내가 거절하자 담임선생님은 교감에게 바톤을 넘겼다. 교감선생님도 선택을 그리 강요하진 않았다. 10여 분 대화끝에 아쉽지만 네가 원하는대로 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면 내가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는걸로 보여서 나와 상대하는걸 좋아하지 않는가보다라는 생각은 그때부터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엔 2개 학교에 복수 지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2 장의 원서를 작성했고 2개의 대학교에 지원을 했고 내가 의도했던 대학에 최종 면접을 갔다. 합격자 발표일에서 사나흘 지난 뒤에서 나는 대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시내버스에 올라 그 대학교로 향했다. 한겨울에 방학중인 학교는 인적이 끊겨있었고 교문 바로 안쪽에 있는 합격자 발표 벽보 앞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전자공학과라는 학과명 아래 내 이름이 보였다. 다시 한번 학과명과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발길을 돌려 서울로 올라간 역순으로 대전에 내려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에, 꿈과 희망과 번민과 회한과 연정의 많은 것들이 교차했던 사연많은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고교시절은 내가 스무살도 못 넘기고 죽을것 같아 보이던 암울한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1, 2 학년때는 거의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고 대학을 간다거나 어른이 되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너무도 힘겨웠던 그 시절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좀 안정되기 시작한 20대 중반에서야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난 성장기의 10년 가까이를 암흑 속에서 살았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바보같고 약해빠졌던 내가 그나마 어른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성장할 수도 있었던 것은 그 소년기 10년의 힘겨운 경험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나로선 그 시기가 너무 일찍 온 것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내 정신적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 언젠가는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종이접기를 할 때 접히지 않은 부분은 어쨌든 접어야 하는 것처럼, 청소년기가 아니었다면 30대, 혹은 40대나 그 뒤에라도 경험했을 정신적 혼란기라고 생각한다. 마치 수두를 어릴 적에 앓지 않았으면 무덤에 묻혀서라도 결국은 앓게 된다는 옛말처럼.

지금에 와서 그 과거를 원망하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세월로 인해서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30대가 되어서까지도 마음속으론 그때 이랬더라면 그때 저랬더라면이라고 아쉬움을 남발하곤 했지만, 그런 가정은 지금의 내 모습과 내 아들과 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라고 깨닳은 뒤로는 그냥 모든 지나간 시간이 다 내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행복했건 불행했건 아팠건 즐거웠건, 그리고 내 단점이건 장점이건 모두 다 내 인생의 인과 관계의 한 과정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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