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아직도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큰 서점에 가면 그 많은 책들을 봐도 맘이 풍요로웠다. 그 당시 서울의 양대 대형서점인 교보문고와 종로서적에 가끔씩 놀러가는 것은 그런 즐거움이 있었다. 아, 저렇게 많은 지식과 상식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언제 다 읽어보나싶기도 했다. 그게 다 옛날 말이다. 요즘엔 가끔 서점에 가면 양서보다 훨씬 더 많은 버릴 책들에 기가 질려버린다. 물론 어떤 이들에겐 양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 그렇다. 그래서 서점에 가는게 요즘엔 그리 즐거운 일이 안된다. 가끔씩 아는 사람들에게서 빌려보는 정도일 뿐이다.
며칠전에 빌려온 9권의 책을 손에 닿는대로 빌려와서 한 권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벌써 3 권을 마쳐버렸다. 여기서 마쳤다고 표현하는 것은 책을 꼭 한장 한장 읽어나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책이라도 판단되면 그대로 덮어버리는 것도 마치는 것이고, 정독해 나갈 필요가 없는 책은 휙 훑어보는 것도 마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며칠간 손에 쥐었던 책 3권은 각각 읽은 책, 본 책, 버릴 책으로 구분할 수 있었고. 제대로 읽은 책은 1권 뿐이었다.
[읽은 책]
로알드 달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의 책들은 이미 절반의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이번에 읽은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도 그렇다. 사실 예전에 읽었던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전반적인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만 했다. 내가 관심깊게 읽은 부분은 “행운 –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 (Lucky Break: How I became a writer)”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어떻게 로알드 달이라는 사람이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세계적인 인기 작가가 되었는지 그 전후 과정을 작가가 직접 적었다. 다른 작가들처럼 거창한 결심이나 문장을 단련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 따위를 했다는 내용은 없다. 너무 가난했다거나 다른 고통을 겪었다고 하지도 않는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유명 작가를 만나고 그에게 자신이 2차 대전에서 겪은 경험담을 알려주기 위해 글을 써 보냈더니 그게 너무 재미있는 내용이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등단하게되었다는 진짜 ‘행운’에 관한 실화이다. 그래도 행운은 준비되고 선택된 자에게만 오는게 맞겠지..
[본 책]
팀 버튼의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책과 비스무리하지만 그냥 그 영화감독의 낙서장이라고 말하는게 더 올바른 표현이겠다. 글자도 몇개 안 나오지만 별 의미없는 것이라 그냥 훑고 지나가고 그림도 낙서질에 가까우므로 그냥 한번 눈도장 찍고 가면 끝이다. 125쪽짜리 책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며 마치는 데에는 30분도 안 걸린다. 이런 책을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펴내는 것은 책이 너무 얇아서 8천원이라는 가격을 매기지 못할 것 같아서인 듯 하다. 책의 앞뚜껑과 뒷뚜껑 두께를 합하면 책 내용의 두께와 거의 같아진다. 이 책을 사는 개인 독자는 팀 버튼의 가족, 그와 친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의 영화의 광신자 (fanatic), 그리고 일부 미친 사람들에 국한될 것 같다.
[버릴 책]
“럭키원 (The Lucky One)” 이라는 제목의 이 책이 남에게서 빌린게 아니라 내 소유물이었다면 제목을 [이미 버린 책] 이라고 했을터이다.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론 어려우니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는게 나은 책이다. 소설의 줄거리? 모른다. 처음 한두장을 넘기는데 욕이 저절로 나올듯한 만큼 엉터리 번역문에 놀랬다. 이건 ‘번역’을 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중학생이 번역한건가 싶어 옮긴이 소개를 찾으려 책의 앞뒤를 뒤졌지만 다른 번역소설엔 반드시 있을 역자소개 부분이 전혀 없다. 그저 표지에 “김진주 옮김”이라고만 적혀있다. 영어 원문이 재밌을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냥 하이틴 로맨스 스타일의 설정으로 보였다. 아래에서 이 책 사진을 보니 또 답답하다. 출판사 이름이 “퍼플레인”이라..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