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 하나 더

By | 2004-03-23

얼마전 미국 산타클라라 파산 법정에서는 실리콘밸리에 소재한 어느 하이테크 회사의 파산 처리 심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경량급 회사는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적자 행진에 지친 그로기 상태에서 날린 회심의 일격이 그만 다른 헤비급 업체의 카운터펀치와 엇갈리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는 법정소송에 휘말리면서 매달 100만 달러씩 소요된 추가 비용 때문에 결국 KO되고 만 것이었다. 이제 그 회사의 몇 가지 사업 부문은 조각난 채 다른 업체로 팔리는 것으로 귀결됐다. 그 회사의 이름은 소닉블루(SONICblue)였다.

필자가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 깊은 이유는 바로 그 회사의 한국 지사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이다. 그 회사에서 일한 것은 겨우 1년 반쯤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보고 느낀 게 참 많았다. 게다가 그 회사가 처음 설립된 후 우여곡절과 흥망성쇠를 거치며 막판에 이른 경과는 가히 여러 하이테크 회사가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의 종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한 번 더듬어 보면 하이테크 업계의 한 단면을 더듬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해 본다.

원래 소닉블루라는 회사의 전신은 S3였다. 이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 터인데, 바로 그래픽 칩 업계에서 한때 강자로 군림했었던 회사였기 때문이다. 새비지(Savage) 계열 칩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는 Trio64 혹은 Trio3D, Virge 계열의 칩들도 꽤 많이 사용되는 그래픽 칩이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그래픽 칩 시장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점유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S3와는 별도로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라는 업체를 기억하는가. 교포 사업가인 이종문씨가 창업해서 나스닥에 상장하게 되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던 이 회사는 그래픽 카드 제품들로 한때 업계 정상 자리에 오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스텔스(Stealth) 계열과 바이퍼 (Viper) 계열의 그래픽 카드들이 있다. 이 카드 역시 독자들의 기억에 한때 잘 나가던 제품들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최초의 지각변동은 1999년에 S3가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를 인수 합병한 일이었다. 당시 S3의 매출규모는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보다 훨씬 적었는데도 다소 무리로 보였지만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그래픽칩 업계의 판도가 급격히 변화하면서였다. S3가 2D 그래픽 칩에 안주하며 3D 칩으로의 이전에 잠시 주춤한 사이에 부두(VooDoo) 계열 칩셋의 성공을 통해 3dfx사가 3D 그래픽 칩 시장의 절대강자로 나서면서 S3의 기력이 쇠진해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엔비디아(Nvidia)가 3dfx의 실책에 힘입어 Riva 계열 칩셋으로 치고 올라간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S3는 더 이상 그래픽 칩에만 안주하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S3에서 생산한 그래픽 칩을 소비해 줄 수 있는 그래픽 카드 업체인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를 인수하게 된다. 다이아몬드에서는 그래픽 카드 이외에도 오디오 카드나 마더보드같은 다양한 PC 부품들을 취급하고 있었기에 S3에서는 그만큼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해 취사선택을 할 수 있어 보였다. 한편 그래픽 칩 업계에서는 결국 3dfx가 Nvidia에게 인수됐는데, 그때가 2000년 말이었다.

S3가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를 인수한 1999년에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픽 칩 부문이나 카드쪽 어디에서도 예전의 영광을 재현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뜻밖에도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보석을 발견했다. 바로 MP3 플레이어였다.

그 당시는 PC 사용자들 사이에는 MP3 방식으로 압축된 음악파일을 주고받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된 것이 포터블 MP3 플레이어였는데 잘 알려진 대로 이의 제품화는 한국의 벤처기업인 디지털캐스트가 처음 이뤄낸 것이었다. S3에 합병되기 직전에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는 300만 달러를 들여 디지털캐스트를 인수해 한국의 자회사로 만들었고 여기서 개발한 첫번째 MP3 플레이어가 미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고무된 S3의 움직임은 과감했다. 회사 이름을 S3에서 소닉블루로 바꿨고, 그래픽 칩 부문을 대만의 마더보드 칩셋 업체인 비아(VIA)에 넘겼으며 마더보드, 사운드카드, 비디오카드 등의 주변기기 사업은 모뎀쪽만 빼고는 모두 중단했으며 향후 디지털 가전 회사로 거듭 나기 위해 개인용 디지털 비디오 녹화기(PVR – Personal Video Recorder) 업체인 리플레이TV를 인수하고 또 DVD와 VCR 플레이어가 함께 내장된 제품을 판매하는 GoVideo사도 인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소닉블루의 앞길은 창창한 것 같아 보였다. 적어도 2000년까지는 그랬다.

2001년에 들어서면서도 이 회사의 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적자행진은 계속됐고, PDA처럼 새로 시작하는 사업들이 실패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거기에 리플레이TV나 GoVideo사의 인수에 소요된 비용이 회사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총 매출이 2억 달러 조금 넘는 규모의 작은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사업부문은 지역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었고 불필요할 정도로 행정과 지원부서가 비대한 상태였으며 인수합병한 회사의 문화차이와 경영권 문제로 적지 않은 문제가 보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몇 차례에 걸쳐 단행했고 그 일환으로 필자가 있던 한국지사도 2001년 10월로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그후 분투를 거듭한 와중에 얻어맞은 결정타는 이 회사의 문을 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장 큰 원인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은 새로이 내놓은 리플레이TV 모델에 들어있는 새로운 기능인 광고를 스킵하게 하는 기능 때문이었는데, 우리나라 TV 방송과는 달리 미국의 상업 TV 프로그램에서는 드라마건 쇼건 매 15분마다 광고가 나오게 편성돼 있다.

이게 시청자들에게는 상당히 짜증스런 것인데 리플레이TV에서는 ‘Commercial Advance’라는 기능을 이용하여 하드디스크에 녹화된 내용을 시청할 때 아예 광고부분을 건너뛰고 안 보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NBC나 CBS같은 대형 TV 방송사의 비위를 거스르게 됐다. TV 광고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방송사들에게는 광고 스킵 기능이 당연히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들은 소닉블루를 상대로 법정투정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매달 100만 달러씩 적자를 보게 됐다. 이게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됐을 것이다.

비록 Rio라는 MP3 플레이어 브랜드명과 비즈니스는 일본의 D&M(오디오 기기 업체 Denon과 Marantz의 모기업)에 넘어가면서 살아남겠지만, 소닉블루라는 이름은 조만간 사라진 이름이 될 것이다. 과거에 명멸했던 수많은 하이테크 업체들처럼 말이다. 특별히 그래픽스 칩 분야만 보더라도 사라진 이름이 많다.

3D 그래픽이 PC로 옮겨오기 전에, 정말로 이 회사말고 다른 회사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곳이 Tseng Lab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PC 내부에 ET3000이나 ET4000 칩이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 나갔었지만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길이 없다. 3dfx, 3D Labs, 렌디션(Rendition), Number 9, 시러스(Cirrus) 등도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업체와는 달리 시러스의 경우에는 아예 일찌감치 그래픽 칩 사업을 중단하고 MP3 칩셋 사업을 시작한 덕분에 지금 그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2D에서 3D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면 아예 다른 쪽으로 간다는 전략의 성공이라 하겠다. 실패하는 업체만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컴팩같은 경우는 좀더 큰 도약을 위해 HP에 흡수 합병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길지 않은 하이테크 산업의 역사에서 뜨고 진 많은 이름들을 떠올릴 때 감회가 새로운 것은 그런 이름 속에서 땀 흘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이번에 사라지게 되는 그 이름 하나는 내가 직접 활동했던 곳이기에 각별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일했던 여러 회사 가운데 유일하게 사라지는 이름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무형의 법인에 불과한 회사명이지만 그 이름에 명복을 빌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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