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피 디스켓의 일생

By | 2003-07-30

은행을 찾아 가면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게 일반적인 순서이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은행을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기 시작한지 벌써 2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이게 다 인터넷 뱅킹 덕분이다. 어지간한 공과금도 은행을 통하거나 신용카드를 이용하여 납부하니 더욱 은행 갈 일이 없어졌고, 그나마 직접 갖다 내야 하는 것들은 가끔씩 우체국을 이용하고 보니 정작 금융기관이라고 할 은행에는 직접 방문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필자는 원래 작업실로 쓰는 다락방의 PC에서만 인터넷 뱅킹을 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거실에 있는 노트북에서도 할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온라인 인증서를 복사하려고 했는데, 인증서 관리창이 열리면서 요구해 온 것은 이동식 디스크였다. 이동식이라고 한다면 USB또는 플로피 디스크 가운데 하나가 있어야 할텐데 필자에게는 USB 드라이브가 없으므로 플로피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집안을 아무리 뒤져도 플로피 디스켓을 찾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잘 생각해 보니 언젠가 집안 대청소를 하면서 대부분의 디스켓을 말끔히 없애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뿔사 워낙 쓸 일이 없다 보니 무심코 다 치워버렸던 것이다.

다시 한번 책상이니 책꽂이니 하는 장소를 뒤진 끝에 만약을 위해 보관해 두었던 MS-DOS 6.2 디스켓을 찾을 수 있었고 그걸로 인터넷 뱅킹을 위한 보안 인증서를 복사하여 거실의 컴퓨터에 설치할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 3.5인치짜리 디스켓에게 감사를 느꼈다. 옛날 애플 시대에 친구에게서 로드런너 게임을 디스켓에 복사해서 소중하게 집에 가져와 설치한 다음에 느꼈던 식의 그런 고마움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이제 플로피가 아닌 USB 메모리를 하나 마련해야 될 것 같다는 필요성도 느끼기 시작했다. 슬슬 세대 교체의 때가 무르익은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필자와 플로피 디스크와의 관계는 1983년의 삼성전자 SPC-1000 컴퓨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약 50만원에 달하던 SPC-1000의 기본적인 보조 저장장치로는 내장된 카셋트 데크 밖에 없었다. 얼마 후에 5.25인치 드라이브 2개가 들어가는 외장형 플로피 드라이브가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그 또한 약 50만원에 달하는 가격대였다. 프로그램을 짜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구입한 그것이었지만 세상에 그런 괴물이 따로 없었다. 베이직을 로딩하는데 어쩔 때에는 5초 정도 걸리기도 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자그마치 30초 가까이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구입한 곳에 물어보고, 또 직접 강남역 사거리에 있던 삼성전자 컴퓨터 사업부의 개발담당자를 찾아가서도 해결방법을 물어보았지만 확장 슬롯의 설계상 하드웨어 오류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돈도 아까웠고 불편하기도 해서 골머리를 썩였고 그래서 직접 하드웨어를 변경해 볼까 생각도 하면서 드라이브 유닛을 뜯어서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했었다. 그 안에는 일본 TEAC 의 플로피 드라이브와 제어 회로가 들어있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고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1년쯤 그걸 쓰면서 그럭저럭 컴퓨터에 대해 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실하게 느낀 것은 소프트웨어의 부재였다. 오죽하면 Z-80 어셈블러 하나 없어서 일일이 책을 보면서 기계어 코드를 숫자로 쳐 넣었을까. 공교롭게도 필자 자신의 프로그래밍 실력에 대해 실망한 것이 그때였다. 같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Z-80의 기계어 코드를 다 외워버렸고 책을 볼 필요도 없이 직접 FF, C0, A6 같은 숫자를 입력하면서 코딩을 했다. 그러면서도 필자보다 우수한 결과물을 더 빨리 만들어냈다. 그는 디버깅도 물론 그런 16진수 바이너리를 보면서 직접 했으니, 그런 두뇌 능력이 없던 필자로서는 어찌 코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겠는가.

그럭저럭 돈을 또 모아 구입한 것은 애플 II 클론이었다. 처음에 그 보드가 들어있던 케이스에는 파인애플 II 라는 모델명이 박혀있었는데 나중엔 케이스를 완전히 벗겨버리고 속의 보드만 꺼내서 사용했다. 허구한날 확장카드를 삽입했다 뺐다 했으므로 케이스가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연결해 사용한 5.2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는 금성정밀에서 만든 검은색 드라이브였다. 헤드가 트랙을 넘어갈 때 냈던 ‘득-득’ 거리는 소리가 꽤 거슬리긴 했지만 가격도 저렴했고 또 성능도 괜찮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디스켓의 내용이 깨지는 일이 그 드라이브의 안정성 문제때문이었는지 플로피 자체의 결함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금성에서는 FDD 사업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뒤로 삼성에서 FDD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삼성전자에 입사해서는 말로만 듣던 8인치 하드디스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PC-8801 모델을 샘플로 수입했던 것인데 거기에 달린 외장형 플로피 드라이브 유닛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로 업무에 쓸 일이 없었기에 한동안 필자의 좋은 장난감이 되어 주다가 회사 재고정리 날에 폐기되었다.

그 뒤에 나타난 것이 IBM PS/2 의 등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3.5인치 디스켓이었다. 필자가 최초에 본 것은 720 킬로바이트 용량이었는데 그것만 해도 360MB의 5.25 인치 디스켓보다 2배 용량이었고 또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셔터가 달려있다는 점까지 보면 참으로 기술이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5.25인치 디스켓도 1.2 메가바이트 용량으로 올라갔고 3.5인치 또한 1.44 메가 바이트 용량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처음에 720 메가바이트짜리 3.5인치 디스켓과 드라이브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한참이나 가시질 않았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CD-ROM 드라이브가 슬슬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그 높은 가격은 돈많은 컴퓨터 매니아들이나 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디스켓은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일한 보조기억 매체였다. 처음 접했던 윈도우 2.0도 오로지 디스켓만으로 설치했고 윈도우 NT 3.1 또한 수십장의 디스켓을 일일이 바꿔 끼워가면서 설치했었다. 멀티미디어 붐이 불면서 어느 정도 CD-ROM 드라이브의 값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CD-ROM 드라이브가 일반화되면서도 디스켓은 여전히 사용되었다. Windows 95건, NT 건 그 최초 설치 때에는 디스켓으로 컴퓨터를 부팅해야 했고 부팅이 되지 않는 따위의 문제가 발생하면 또한 디스켓이 필요해졌다. 최소한 CD-ROM 으로 부팅할 수 있는 시대가 올 때 까지는 그런 식으로 디스켓의 수명이 연장 되었다. 그 뒤의 이슈는 더 이상 플로피 디스크가 언제까지 사용될까라는 물음이 아니라, 그 다음 세대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였다.

플로피의 자리를 이을만한 보조기억장치의 후보로서 참으로 다양한 물건들이 시장에서 마케팅되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것은 Iomega의 ZIP 드라이브였다. 처음 나온 100MB 제품을 플로피 드라이브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Iomega에서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덕분에 메이저 PC 업체 중에서 드라이브 베이에 내장형 ZIP 드라이브를 기본 장착해 출시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CD-ROM 레코더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면서부터는 ZIP 드라이브는 급격히 몰락해 버렸다. 이후에 발표된 250MB 용량의 ZIP 드라이브도 그런 대세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 뒤에도 플로피를 자리를 노리는 후보는 여럿 등장했다. 소니가 만들어낸 음악용 디지털 미디어인 MD, 즉 미니 디스크도 그 가운데 하나였지만 시장에서 몇 가지 시도를 해 본 소니는 현명하게도 그런 아이디어를 접어버렸다. 3M 에서는 수퍼디스크라고 불리우는 LS-120 디스크와 그 드라이브를 내놓았다. 기존의 1.44MB 용량이 3.5인치 디스켓을 그대로 활용할 수도 있으면서 전용 디스크를 이용하면 120MB 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ZIP 드라이브나 MD 같은 것이 기존의 3.5인치 디스켓을 활용하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라는 생각 아래 개발된 것이었지만, 이 역시 플로피를 밀어내진 못했다. 가장 최근에 시도된 것은 데이터 플레이라는 것이었지만 이 경우는 아예 시장에 정식 진입하기도 전인 작년에 회사가 문을 닫아 버렸다.

플로피 드라이브가 본체에서 빠지기 시작한 것은 애플에서 iMac을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애플과 PC 기종간에는 그 구조나 용도 등이 달랐지만 분명히 그 때부터 슬슬 플로피 드라이브를 없애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FDD가 달려서 나오는 컴퓨터가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많아 보인다. 설사 사용되지 않을 것 같아도 업체들로선 그걸 빼버리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일반 전화선 모뎀의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제 많은 사람들이 USB 포트에 꽂아 쓰는 플래시 메모리 장치를 애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전에 플로피 디스켓을 밀어내려고 시도했던 다른 어떤 장치보다도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의 운영체제에서는 따로 드라이버 프로그램을 설치할 필요도 없어졌고, 크기도 작으며, 읽고 쓰는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원한다면 기가바이트 급의 용량도 쓸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얼리어답터와는 거리가 먼 필자도 이제 USB 메모리 장치를 사용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렇지만 당장 플로피 드라이브를 빼 버리진 않을 것이다. 분명히 앞으로 몇 년간은 최소한 몇 번은 쓸 일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래도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컴퓨터 본체에 달려있었기에 그게 없어진다는 점에 불안해 지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홈뱅킹을 하다가 문득 필요해진 플로피 디스켓의 존재 덕분에 그를 대치하려 시도했던 과거의 많은 것들을 기억해 봤다. 기술은 그렇게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플로피 디스켓은 참으로 오래 살아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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