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어느 재일교포가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한 뒤, 석방의 조건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과거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그 소설의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이 생각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던 당시의 상황에 관해 우리나라 정부에는 대충이라도 서술한 기록이 하나도 없는 반면, 일본 정부에는 지금도 그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보고한 문서들이 고이 보관돼 있다고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 내에서 납치사건의 범인인 재일교포의 행적을 조사하려 했더니 전혀 기록이 없어서 일본 경찰이 한국으로 파견와서 조사한 후 실마리를 얻은 것이 바로 그 사람 성씨의 족보 덕분이었다. 어느 혈통에 대해서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에 걸쳐 존재한 모든 자손들을 다 열거해 놓았으니 당연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도 족보가 있다고 한다. 중국에는 종보(宗譜), 일본에는 가보(家譜)가 있고, 서구에도 ‘Family Tree’같은 족보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미국 대통령이 뽑히면 그의 조상이 영국 어디 출신의 이민자였으니, 영국 왕실과는 촌수가 어떻게 되느니 하는 기사가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의 족보 그 어느 것도 우리나라 족보처럼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돼 있거나 오랜 역사를 가지진 못했다. 우리의 족보를 보면 핏줄에 관한 우리 민족의 집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같은 성씨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선 중요한 일인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이름이 아닌 우리나라 기업의 이름을 생각해 보자. 대기업들의 이름을 보면 여기서도 종친 관계를 발견해낼 수 있다. 김학준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성은 ‘김’이다. 이처럼 기업들도 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곤 한다.
‘삼성전자’에서는 ‘삼성’이 성이 된다. 그의 형제들로는 삼성전기, 삼성SDS, 삼성SDI같은 회사들이 있겠고, 자매로는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물산같은 회사들이 있다. 사촌들은 성이 다를 수 있지만 핏줄이긴 하다. 제일기획, 신라호텔, 에버랜드같은 회사들이 사촌뻘이겠다.
사람의 성씨가 다른 성씨로 갈라져 나가기도 하는 것처럼, CJ라는 성씨가 갈라져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삼성씨라고 해서 다 같은 삼성씨가 아니다.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가 서로 다른 성씨인 것과 마찬가지로 삼성출판사 또는 삼성제약은 삼성전자 가문과는 본관이 다르다.
현대라는 성씨도 큰 집안이다. 현대전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건설같은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그 가문의 일원이다. 엘지 가문은 좀 색다른 경우로서 금성씨와 럭키씨가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구성원으로는 엘지전자, 엘지텔레콤, 엘지화학, 엘지애드, 엘지상사 등이 있는데, 최근에는 데이콤이라는 덩치 큰 양자를 들이기도 했고 엘지필립스나 엘지IBM 과 같이 외국의 큰 가문에 시집장가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가끔씩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경우들이 생기곤 한다. 혹은 기존 회사내의 어떤 사업을 분리해 내서 전혀 새로운 회사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다른 회사를 인수해서 자회사로 삼기도 한다. 이럴 때도 대기업들은 자신의 성씨를 붙이곤 한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회사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를 돌파하기 위해서 내부 조직과 사업을 대폭 정리하고 회사 이름도 참신하게 바꾸겠다는 경우이다.
현대전자의 반도체 부문이 한 예인데, 새로 만들었다는 하이닉스라는 이름은 실망스러웠다. 정말 Hyundai의 앞 글자를 따서 Hynix라고 해야만 했을까. 새로운 회사라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현대 계열사 가운데는 Hysco라는 것도 있다.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성을 만들기는 싫었나 보다. 성씨의 계승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그대로 물려받고 싶었나 보다.
이런 식으로 거대 기업군이 한 가지 성씨를 가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래도 그 기업군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대부분 한 개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일체감을 지니게 할 수도 있고, 또 그 한 개인이 느끼기에도 ‘내것’이라는 흡족함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가 지닌 지분이 단 몇 %밖에 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브랜드 네임의 힘 때문일 것이다. ‘삼성’이라는 강력한 성씨를 가진 회사의 제품이라면 최소한 기본은 한다라는 것이 일반 대중이 믿는 바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은 이유다. 외국에서 온 손님을 차에 태우고 가던 중에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고층 아파트 단지를 여럿 봤는데 그 중에 몇 개 건물의 벽에 삼성 로고가 커다랗게 붙어있었다면서, 그 건물들이 모두 삼성의 재산이냐는 질문이었다.
필자도 아파트에서 몇 년 살아봤지만 그 외국인의 질문을 받고서야 비로소 아차 싶었다. 아파트는 삼성에서 지었든 현대에서 지었든 소유자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데, 왜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회사 이름이 커다랗게 붙어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삼성 가문이나 현대 가문의 이름을 써넣을 수 있으니 그것이라도 영광으로 삼아야 할까. 하긴 그래야만 집의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규모 건설업체가 지은 아파트나 연립주택에도 모두 그 업체의 이름이 붙어있는걸 보면 그냥 타성에 젖어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것도 가문의 영광을 아파트에 반영하고 때문일까. 비록 그런 대기업들이 실제로 짓기보다는 하도급을 통해 다른 중소 건설업체로 하여금 짓게 한다고 해도 말이다.
아파트에 붙여지는 이름도 바꾸고 싶고, 회사 이름이라고 만들어지는 이름도 좀더 참신한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대기업의 경우는 물론, 중소기업들도 그렇다. 맨날 신문 지상에 나오는 회사들이 삼성이니 엘지니 현대로 시작되는 것은 이제 지겨워졌다.
HP에서 떨어져나간 계측기 부문의 이름이 애질런트(Agilent)이었고, AT&T에서 분사한 통신장비 부문의 이름이 루슨트(Lucent)인 것처럼 말이다. 이왕 바꾸려면 확 바꿔버리고 아니면 계속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름으로 남겨놓는 게 낫지 않을까.
또 관계사라고 해도 맨날 그 나물에 그 밥 식으로 이름을 만들기보다는 나름대로 기업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멋들어진 이름이 좋을 것이다. 전자계열 회사라고 해서 다들 현대전자니 엘지전자니 혹은 삼성전자니 하는 것처럼 ‘성’에다가 ‘전자’라는 종목만 갖다 붙이지 말고 말이다. 이제 좀 이름 좀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