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짓기 마무리 단계에서

By | 2002-05-16

지난 주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 집 짓는 작업이 중단됐다. 이유는 전기공사 때문이었다. 전기공사를 맡았던 업자가 현장에서 갑자기 공사 대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사실 일반 주택을 지으면서 필자의 집처럼 LAN 케이블과 동축케이블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전원도 220V뿐 아니라 접지가 모두 제대로 된 110V 전원까지 따로 넣게 만드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사 대금을 50% 인상해주기로 했던 것인데, 정작 공사 당일에는 100%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공사를 중단하고 다른 업자를 찾고 싶었지만, 실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건축 업자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먼저 항복해 버렸다. 지금 단계에서 벽 속에 케이블을 매립하는 전기 공사를 하지 않으면 벽체 위에 석고 보드를 바르게 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해서 다른 전기업자를 찾아서 시작하게 만들 때까지의 이삼 일 정도를 할 일 없이 노느라고 허비하게 될 인건비 때문에 더 손해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런 점을 미리 알고 있는 전기 업자에게 넘어간 꼴이 돼버렸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어제부터는 그 전기 업자가 이젠 돈을 선불로 달라고 난리다. 전선 종류는 벽 속에 모두 매설이 되었고, 그 위로 석고 보드도 바르고 벽지까지 완료된 상태라서 이제 콘센트와 스위치, 전등, 그리고 LAN 커넥터 등을 달아야 할 시점인데 말이다. 그건 절대로 안될 일이지만, 공사가 지연되고 이삿짐이 들어가는 날짜도 미뤄야 할 상황이 돼버렸다. 하지만 이사를 제때 못하는 한이 있어도 선불을 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 버티고 있다. 정 안 되면 내가 이번 주말에라도 직접 공사를 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이미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 업자인지 판정을 내려진 마당에 미리 돈을 줘버리면, 공사의 내용이 어떨 지는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선불을 받지 않고라도 공사를 진행하는 쪽으로 일단락됐다.

그래도 아직 작업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건축주인 나와 도급업자인 그와는 또 다시 인연을 맺을 일이 아니므로 냉혹하게 해야만 한다. ‘건축 현장’에서는 신의가 존재할 지 모르지만, 이런 ‘노가다판’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기 공사 쪽에 문제가 생기다 보니, 쓸데없이 ‘Wired Home’이라는 것을 만든답시고, 돈 축내고 시간 축낸 게 아닌가 하는 후회마저 들기도 한다. 평범하게 전기불 켜고 TV 연결하는 정도로만 만들어 놓고 홈 네트워킹은 무선 LAN으로 해결해 버려도 됐을텐데….

굳이 UTP 케이블을 방마다 깔아놓고 RJ-45 잭을 벽에 뽑아놓은 이유는 기존에 상용화돼 있는 무선 LAN의 전송속도와 성능에 한계가 있어서였는데 지금처럼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면 차라리 무선 LAN쪽이 가격(노력) 대 성능비 면에서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은 집을 설계하기 전에도 했었다. 그러나 그 때는 홈 네트워킹에서 최고 속도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고, 그 네트워크 상에서 컴퓨터뿐 아니라 다른 가전기기까지 TCP/IP 방식으로 사용하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하드웨어 엔지니어로서의 실험 정신까지 발동한 것이었다.

차세대 홈 네트워킹 방식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은 파이어와이어(IEEE-1394) 규격도 기존의 Category 5 UTP 케이블 상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 거들었던 게 사실이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부딪힌 지금은 그런 이상들이 좀 퇴색해 버린 느낌이다. 누가 말했던가? 자기 살 집 한 채 지으면 10년 늙는다고.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원래 의도했던 네트워크 케이블이 벽 속을 통해 방방마다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집이 완공되고 나서 잃었던 기력을 다소 되찾게 되면 나의 실험정신은 다시 머리 속으로 돌아올 것이고 이 집은 필자의 하이테크 놀이터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다.

이제 다시 집짓기의 마무리 작업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미 원래의 입주 예정 날짜를 훌쩍 넘겼지만 그래도 다음 주에 이사할 예정이다. 새 집에 들어가게 되면 집 짓는 이야기는 그만 두고, 다시 예전처럼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며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사실 요즘엔 그게 안 된다. 당구를 처음 배우면 지하철 안의 사람들 머리가 모두 당구공으로 보이고, 테트리스 게임에 빠진 뒤로는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천정 벽지의 사각 무늬가 내 몸 위로 떨어져 내리는 환각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은 머리 속에 온갖 건축 자재에 관한 생각만 꽉 차 있어서이다. 다음 주면 그 모든 것을 초기화시킬 수 있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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