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와 관리자

By | 2002-02-01

요즈음 몇 달 간 계약직으로 컨설팅 일을 하고 있는 필자에게 어떤 벤처 회사의 엔지니어가 하소연을 해왔다. 현재 자신이 대기업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서 그토록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데도 도대체 윗분들은 그걸 인정하질 않는다고 말이다.

흔히 듣는 말이고 필자 역시 개발 일선에 있을 때 많이 느꼈던 점이기도 하다. 때마침 누군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받아서 여기 한 번 소개해 본다. 아마 인터넷상의 어딘가에서 개발자들 사이에 떠도는 내용인 것 같다.

관리자와 개발자

① 관리자들은 전자신문에서 읽은 XML, 모바일, CMS 등의 신기술을 열거할 줄 아는 것만으로 자신은 관련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비전이 있는 관리자라 생각한다.

② 관리자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능들을 나열한, 혹은 데이터베이스와 서버를 나타내는 도형들을 몇 개의 화살표가 이어주는 10페이지짜리 파워 포인트로 제품 설계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③ 관리자들은 회사의 필요에 따라 프로젝트 기간을 정하고 이를 엄수하는 것은 개발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외국에서 6개월 걸리는 프로젝트를 3개월만에 끝내도 회사가 2개월안에 판매해야 이익을 볼 수 있는 경우라면 개발자 때문에 실패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④ 관리자들은 개발자들이 신기술을 익히기 위해 업무 시간에 스펙을 보거나 관련 사이트를 브라우징하는 것은 업무 태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기술을 적용해야 하는 제품을 원하는 기간에 만들 수 없다면 무능한 개발자로 취급한다.

⑤ 프로젝트의 설계와 테스트에는 절대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오직 개발자의 축적된 꼼수와 밤새운 삽질로 겨우 돌아가는 제품이 완성됐을 때 버그라도 하나 발견되면 개발자는 거의 도덕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질책을 받는다.

⑥ 제품이 성공하면, 이는 관리자의 프로젝트 관리 능력과 비전, 그리고 무엇보다 영업팀의 적극적인 마케팅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센티브도 그들이 나눠 갖는다(개발자들에게는 “xx씨 이제 프로젝트도 끝났으니 놀겠네” 정도 인사치레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⑦ 관리자 한 명을 키우는 데는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업사원 한 명에게는 직책에 적합한 아이디어와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 인맥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개발자 한 명은 언제든지 구직 게시판에서 데려올 수 있다.

⑧ 관리자가 원도우 XP가 필요할 수도 있고 영업 사원이 최신 노트북이 필요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개발자가 모델링 도구나 O-R 매핑툴, 또는 프로파일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⑨ 신문에서 벤처 기업의 성공담을 읽는다면 “분명 저기에서 일하는 개발자들은 매일 밤새워 일 할거야. 근데 왜 우리 직원들은 저 모양이지?” 하며 10시에 퇴근하는 개발자들을 원망한다.

⑩ 개발자는 한 번 손을 댄 제품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진다. 고객에게 문의 전화가 오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거 누가 만들었어? xx 데려와 봐” 하는 식으로 이미 다른 프로젝트에 정신없는 개발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위에서는 원래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기 위해서 받은 내용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보였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개발자들에게는 가슴에 다가오는 글귀가 몇 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리자들에게는 어떤 내용으로 받아들여질까?

필자도 최근까지 관리자였다. 개발자 출신의 관리자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경력의 관리자와는 느낌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몇몇 항목들에 대해서는 ‘그렇지’라는 긍정을 할 수 있었다.

요즘엔 개발자 출신의 관리자가 아주 많아졌는데 그런 이들도 많이 필자처럼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그런 기술직 출신의 관리자들 밑에서 일하는 개발자들은 위에서 나열한 불만사항들을 덜 느끼고 있을까?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관리자가 되면서 옛날에 자신이 불만스러워 했던 관리자처럼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직장 생활 초년병 시절에 가졌던 미래에 대한 기대 가운데에는 ‘장차 개발부서의 관리자가 되면 저런 관리자는 되지 말자’라는 내용도 있었다. 연구원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며, 충분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자는 계획이었다. 마침내 약 8년 만에 팀장이 됐을 때도 필자는 그 계획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적극 그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한적도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직 우리의 기업 체계와 직장 문화는 위와 같은 개발자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다. 관리자 혼자 개발자들을 위해 신경을 써도 윗선으로부터 혹은 타부서로부터의 압력은 결코 그걸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종국에 가서는 회사의 이익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사원들의 꿈과 희망을 밝혀주느냐라는 갈림길에 서기도 한다. 어쩌면 중간에서 분투하는 관리자가 가장 힘겨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필자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개발자와 관리자의 관계는 사실은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심하게 다른 입장을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회사가 처해 있는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돼 있는 조직 문화때문에 그런 결과가 빚어질 뿐이다. 결국은 사람이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다.

관리자도 개발자도, 그리고 회사의 대표까지 모두 상호 존중과 업무 프로세스의 이해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 개발자건, 관리자건, 그리고 영업 인력까지도 모두 회사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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