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처럼 방랑자처럼 때론 하이에나처럼

By | 2001-10-10

몇달 전의 일이었다. 그는 어느 MP3 플레이어 업체의 마케팅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회사와 필자의 회사 사이에는 특별히 진행되는 비즈니스가 없었지만 그는 거의 매주, 가끔은 귀찮을 만큼 전화를 걸거나 직접 방문을 해 와서 그 회사의 제품 이야기, 업계 이야기 혹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게 모두 주요 고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고, 그 때문에 필자는 어떤 비즈니스 가능성이 있어보일 때마다 좋건 싫건 그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해 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거의 한달 동안이나 그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워낙 회사 일이 많고 바빴기 때문에 특별히 그에게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그 회사의 다른 영업사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는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업사원에게 물어보았더니 “다른 부서로 옮겨서 지금 바쁘게 일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그 번호는 계속 응답이 없는 게 아닌가.

사실이 밝혀진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누군가 낯선 사람들을 대동한 그가 필자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내민 명함에는 전혀 다른 회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같은 MP3 업계였고, 역시나 직급도 대리에서 과장으로 한 단계 올라가 있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 연봉은 얼마나 올랐을까. 스톡옵션은 얼마나 받았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내 마음을 읽은 듯, 그의 얼굴에도 약간은 겸연쩍은 미소가 스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곤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 회사에 대한 소개와 제품 설명, 그리고 당시 업계 얘기를 나누었고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필자가 일하던 업계는 정말 좁은 세상이었다. 손바닥 안의 일을 보듯 모두가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인력 구성도 뻔했기 때문에 위의 예처럼 수시로 이 회사 저 회사 문을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다.

지난 달에는 갑이라는 회사의 영업부장이었다가, 이번 달에는 을이라는 회사의 영업이사로 자리를 옮기는 식의 이동은 아주 흔했다. 영업 부문만큼 잦고 복잡한 이동이 있지는 않았지만 개발 인력의 이동도 꽤 많았다.

재미있는 점은 이쪽 업계가 한창 붐을 이뤄서 너도 나도 뛰어들 때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즘처럼 경기가 위축되고 업체들이 축소될 때도 여전히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좀더 나은 조건을 찾았던 것이고, 이제는 생존 차원에서 약육강식의 법칙을 몸소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어느 업계나 철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필자가 예로 든 전자정보 업종보다는 보험이나 증권같은 금융업계가 훨씬 더 스케일도 큰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다. 필자를 최근의 회사에 소개했던 헤드헌터도 갑자기 연락이 안돼서 궁금해 했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을 받고서야 다른 헤드헌팅 업체로 자리를 옮겼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직접 연결되는 고객의 숫자만큼 그들의 머리값이 올라가는 것이다.

15년 정도의 경력을 통해 벌써 4개의 직장을 거친 필자도 어쩌면 철새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물론 필자는 각각의 직장에서 했던 일이 전혀 다른 일이었고, 이전의 회사와 전혀 부딪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첫번째는 컴퓨터 모니터, 두번째는 레이저 스캐너와 프린터, 세번째는 GPS 동기장치,네번째는 MP3같은 식으로 말이다. 사실 한 회사에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같은 업계의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주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더구나 자신이 그 안에서 적지않게 중요한 인물일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 이제까지 자신이 몸담았던 곳을 이제는 적으로 만들어서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니, 그건 어지간히 얼굴이 두껍고 강심장이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어제의 동료들을 경쟁자로 만들어서 결전을 벌이다가 자신이 이기게 되면 옛 동료들은 쪽박을 찰지도 모르는데도?

실제로 그렇게 옮긴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유는 가지각색이지만, 대체로 한가지는 공통적이다. ‘내가 직장을 옮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회사가 나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회사에 비전이 없다’, ‘회사 내에 인맥과 학벌의 차별이 있다’, ‘도저히 사장을 믿을 수 없다’, ‘월급 못받은지가 몇 달째다’ 등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

물론 그중의 절반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거나 책임까지 팽개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남이 땀 흘려 만들어 놓은 터에서 이익은 자신이 빨아먹고 때가 되면 또 떠나는 그들. 철새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이에나에 가깝지 않은가? 어차피 이동이 잦을 수 밖에 없는 이 업계에서 새 일터를 찾아야 한다면, 썩은 고기를 줍기보다는 신선한 고기를 위해 사냥하러 떠나는 짐승이 되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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