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껍데기는 가라”

By | 2001-06-27

‘무료 입장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아쉽게도 영화나 음악회 혹은 놀이공원같은 곳에 갈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 이것은 모 업체가 보내준 것으로, 코엑스에서 열리는 한국컴퓨터/소프트웨어전시회, 즉 SEK 2001의 무료 입장권이다.

날짜를 보니 어제부터 열린다고 돼있는데, 걸어서 바로 15분밖에 안걸리는 곳이지만 별다른 생각없이 무시해 버린다. 조금 있다가 젊은 사원한테 줘서 갔다 오라고 해야지. 어차피 이젠 도우미 구경하러 갈 나이도 아니니깐…

언제부터인가 전시회를 가지 않게 됐다. 코엑스가 새 단장을 하고 나서도 한두 번인가 가봤을 뿐이다. 더구나 대치동쪽에 세워진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해마다 그렇게 자주 전자, 컴퓨터, 인터넷 관련 전시회가 열리지만 말이다.

그런 전시회를 상품으로 친다면, 필자와 같은 고객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는 상품인 셈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긴 가는 모양이다. 가끔 점심 약속 때문에 코엑스쪽으로 가다 보면, 회사 이름이 커다랗게 박힌 종이백이나 비닐백에 상품 광고 전단을 가득 넣고 다니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보곤 한다.

필자가 사회 초년병이던 80년대 중반, 필자가 대기업에서 목격한 광경 중에는 전시회 출품 준비 작업이 있었다. 그 회사들의 자랑스러운 연구원들이 밤을 지새며 했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전시회 출품을 위한 제품 준비였다.

전시회 출품 제품이란 것이 실제로 생산해서 판매될 제품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외에 단지 전시회에만 내보내서 그 회사의 기술력이라는 것을 국내외에 떨쳐보이고 싶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서 세계 최초니, 혹은 국내 최초라는 표현을 입이 닳도록 외쳐댔었다. 제품 출시는 하지도 못하면서 그런 겉멋은 빠지지 않고 부렸던 것이다.

여러 해전 어떤 전시회에서는 국내에서 제일 큰 두 가전업체가 커다란 부스를 나란히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쪽에서 전시된 것과 똑같은 제품이 반대편 부스에서도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라벨만 다른 채로. 사실상 직접 만든 것들이라고 해도 내부 부품들은 모두 일제였을테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한 회사가 ‘첨단 기술을 가진 회사’라고 광고했더니, 다른 회사는 ‘그렇다면 우리는 최첨단’이라는 식으로 체면치레 싸움만 되풀이 하곤 했다. 마치 우리집에 금송아지 있다, 우리집엔 금돼지 있다고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누구 껍데기가 더 화려한지 대결하는 양상이다.

이제 이들 회사의 기술력도 높아져서 그렇게 말로만 첨단 운운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전시회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항상 가봐도 그리 신제품, 신기술이라고 인정해 줄 만한 게 많지 않다.

도우미는 늘 그렇듯이 젊고 반반하고 몸매 좋은 여성들이었고, 복장도 짧은 치마같은 뭇 남성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부스들은 시끄러워서 차분히 제품 감상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조금이라도 더 자기네들쪽으로 잡아보려는 의도로 고출력 앰프를 꽝꽝거리면서 음악을 틀어댄다.

내세울 만한 제품이 없으면 이렇게 소리 크기로 대결하고, 또는 대형 TV 화면에 액션 영화를 틀어서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그 때문에 TV 보는 사람들로 인해 통로가 막혀 다른 쪽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많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그 모습이 그 모습이다.

따라서 전시회에서 보게 되는 것이 실체보다는 껍데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긴, 그렇게 껍데기라도 치장하지 않는다면, 혹은 예쁘장하고 늘씬한 도우미들이 각선미를 자랑하고 있지 않으면 그곳에 도무지 사람이 모이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중소기업들의 자그마한 부스에는 도우미도 고출력 앰프도, 대형 TV가 없어 방문객마저 없는 외로운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전시회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고작 껍데기만 보러오는 존재에 불과한 걸까.

회사 업무 시간 중간에 다녀온 전시회에 대해 나중에 회사에서 자신들끼리 나누는 얘기는 어느 부스의 도우미가 예쁘더라, 혹은 어느 부스에서 주는 판촉물이 좋더라는 정보밖에 없지 않을까.

신제품, 신기술 정보의 향연이 돼야 할 전시회에서 이렇듯 체면치레와 겉멋 부리기만 난무하기 때문에 필자는 그런 곳에 자주 가지 않는다. 제대로 된 기술, 올바른 정보가 제공되는 그런 곳에만 가보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문득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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