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지 못하는 그들도 “운동장이 필요하다”

By | 2001-06-04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말이 주로 노인들 당사자의 입에서 주로 나왔던 것 같다. 아마도 늙고 병들어 자식들에게 짐만 되니 더 살아서 무엇하냐는 푸념이었으리라. 또는 늙어서 다른 사람 눈치만 보게 되고 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사느니 차라리 그만 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자탄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비난조로 말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엔 워낙 세대차가 심하게 나고 노인들이 정서적으로 젊은이들과 동떨어져 있는데다가 유교적인 경로사상이 살아숨쉬기 힘든 세상이 되고보니 그런 면이 더 부각된 것 같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이 당연할 텐데 말이다.

한두 해 전쯤,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와 가까운 일원동에 장애자 학교를 세우기 위한 기초 공사가 시작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근처의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모두 몰려나와 공사를 못하도록 온몸으로 막으면서 ‘결사반대’의 기치를 높였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장애자 학교를 세우게 놔두느니 차라리 죽겠다’라는 의미인 것같은데 왜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하는지 이유가 사뭇 여러가지였다. “애들이 장애자들 흉내낼까봐 그런다”느니 “주변의 초등학교들도 시설이 엉망이고 2부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무슨 놈의 장애자 학교냐”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아파트값이 떨어질 것이므로 안된다”라는 주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각종 플래카드가 아파트 단지 근처에 붙어있는 와중에 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0미터도 못 걷는데 100미터 운동장이 웬 말이냐”

지방에 살고 계신 필자의 부친은 올해 71세이시다. 하지만 첨단 제품을 이용하는 데는 젊은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신다. 집에 안 계실 때도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을 VCR의 예약녹화 기능을 이용해 자동 녹화를 하시기도 한다.

휴대폰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알고 계신 모든 연락처 정보를 그 안에 일일이 저장하실 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기능들도 곧잘 이용하신다. 오디오나 집안의 다른 전자제품들을 다루는 일도 너끈히 하신다.

그리고 작년 초부터는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하셨고, 한국통신의 ADSL 서비스에 가입하신지도 이제 몇 달이 지났으며, 거의 매일같이 코넷의 네오스톤 인터넷 바둑 서비스를 통해 손주뻘되는 젊은이들과 몇 시간씩 바둑 대결을 벌이시곤 한다.

하지만 다른 전자제품들과는 달리 컴퓨터는 번번히 아버지를 좌절시키곤 한다. 아이콘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그 다음부터는 인터넷이 안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아예 윈도우 98 부팅이 안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며칠씩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서울에 있는 필자가 금새 달려가 봐드릴 수도 없는 형편이라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다.

처음 ADSL 설치 후 한동안은 무조건 한국통신의 ADSL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부탁하셨다고 한다. ADSL 문제가 아닌데도 그때마다 방문해서 손봐준 한국통신 직원에게는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

아버지는 컴퓨터와 친해지기 위해 일반 컴퓨터 학원은 물론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강좌에도 다니기도 하셨고, 또 필자와 동생이 방문할 때마다 이것저것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결국 컴퓨터와 인터넷의 그 화려한 기능을 다 쓰지 못하시고 온라인 바둑, CD와 비디오 CD 재생, 그리고 간단한 게임 몇 가지만 하고 계실 뿐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컴퓨터는 다른 전자제품과 기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종류인 것이었다.

왜 그게 안되는 것일까. 아마도 오늘날의 컴퓨터는 심신이 건강한 젊은 사람들을 주사용자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젊은 세대도 나이를 먹으면 그땐 다들 “늙은이들도 컴퓨터를 쓰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래도 눈이 침침해지고 원시가 되고 손놀림도 느려지면서부터는 팔팔한 젊은 사람들과 같은 방식의 컴퓨터 사용은 어려워질 것이 틀림없다.

결국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뭔가 새로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와 타이틀이 필요해진다. 장애인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그런 것은 노인이나 장애자들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서 그들을 위한 컴퓨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 대해 개발자들이 신경을 쓰지 않고 있고, 또 그들을 위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하나 제대로 없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이라면 그 안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없게끔 기술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비록 걷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인터넷의 드넓은 운동장을 컴퓨터로 나마 활보할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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