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과 현대판 노비제도

By | 2001-02-11

지난 1월 18일, 테헤란 밸리의 한복판인 역삼동 금융결제원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근처에 자리잡은 벤처기업 몇 개에 근무하고 있는 노조원들 가운데 약 100여 명이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왜? 한때 희망하는 결혼 배우자의 직업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인기가 높았던 벤처기업 사원이, 또 이른바 엘리트라고만 알려져 있는 잘 나가는 벤처회사 연구원들이 이런 시위를 벌인 것이었을까?

더 많은 것을 원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바로 외부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런 식의 환상을 깨고자 차가운 겨울 바람을 무릅쓰고 길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오늘도 적지않은 벤처기업의 직원들이 혹사당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신문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 나가는 벤처업체 사장들의 인터뷰에서는 “오늘도 잠을 잊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느니, “지난 1년간 휴일 없이 신제품 개발을 해 온 끝에 이처럼 성공을 이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많은 벤처기업들은 실제로 이처럼 일해왔고, 그 성공의 결과를 노사가 모두 누리기도 한다. 바로 스톡옵션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처럼 스톡옵션이 찬바람을 맞기 전에는 수억 내지 수십억원 몇 년간 피땀 흘리며 함께 노력해 온 결과를 누리면 얼마나 뿌듯할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보람찬 헤피엔딩 스토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혹은 M&A를 눈 앞에 두고 창업 때부터 함께 밤을 지새온 동지들을 마치 숙청하듯이 내몰아버리는 현실도 목격했다. 한편으로는 서너명이 창업자금을 한 데 모아 사업을 해 왔고 그 가치가 엄청나게 커졌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장이 “그때 꿔 준 돈 고마웠다. 여기 원금과 이자가 있으니 받아라”라고 하면서 아예 회사의 지분 자체를 인정치 않는 현실도 봤다.

한 기업에서는 외국계 업체에 합병을 시키는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면서 회사가 어려워 문을 닫는다는 엄살을 부리며 그동안 공들여온 대부분의 사원들을 한 번에 해고한 일도 있었다. 곧 스톡옵션을 준다고 회유하면서 벌써 2 년 여째 최저 임금만 지불하고 있는 곳도 필자는 알고 있다.

벤처업체들은 또한 특례보충역 지정업체가 되는 것을 중요시한다. 많은 숫자를 뽑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저 2년 동안은 저임금에 밤낮없이 일을 시켜도 되는 비교적 재주있는 일꾼을 확보할 수 있어서 이다. 이를 악용하는 일부 벤처업체에서는 ‘너 군대 갈래?’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암암리에 하기도 한다.

지난 달에 시위를 했던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한 업체에서는 사원들이 벤처 업체 대표의 착취에 반발해 노조를 설립했더니 회사측은 일방적으로 병역 특례 업체 자격 자체를 취소 신청해 그 제도를 통해 들어온 9 명의 사원들이 자동 퇴직당하게 됐다고도 한다.

이런 사태는 테헤란로에서만 벌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벤처의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대학 캠퍼스에서도 노비제도는 자리잡고 있다. 많은 대학교수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벤처 창업을 했다. 그렇다면 그 벤처 업체의 기술과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것은 누가 될까? 역시 그 인력 중의 상당 부분은 그 교수에게 배우고 있는 대학원생들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스톡옵션이나 병역특례보다 더 고약한 경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양심적인 지성을 지녔고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는 대다수 교수들은 제자들에게 사회 경험도 쌓고 현장에서 쓰이는 지식도 가르치며, 또한 그 벤처가 성공했을 때의 금전적인 보상까지 나눠주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학생들은 벌써 일찍부터 착취당하는 사회의 쓴 맛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이번 벤처업체 연구원들의 시위를 보고 충격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사건은 수면 아래에서 곪고 있던 문제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가진다는 속담처럼 벤처 직원들의 현대판 노비생활 위에서 일부 벤처 대표와 투자자들만 뒷주머니를 불리고 있는 상황이 확산된다면, 그것은 21세기 벤처 국부론을 표방하는 국가 정책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안된다.

이런 문제들은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한 정책상의 대책이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일회성 구호만으로 해소될 일이 아니다. 벤처의 윤리의식 정립과 기업 정의의 확립을 통해 벤처 운영자나 직원, 그리고 투자자 모두가 공통적인 시각을 가지고 벤처기업론을 펼쳐가야 한다.

모처럼 불어온 벤처의 꽃을 만발하게 만들기 위해서 설사 일부의 현상으로 그칠 뿐이라고 해도 이런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벤처기업의 연구원은 노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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