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less Office의 허상

By | 2001-01-22

약 15년 전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삼성전자에서 필자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4.77MHz의 8088칩을 사용하는 표준 IBM PC에, 하드디스크 없이 5.2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만 덩그러니 달려있는 컴퓨터를 가지고, 더군다나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는 삼성전자가 자체 개발한 ‘글벗 16’이라는 아주 원시적인 것을 사용해야 했다.

‘도대체 이걸 가지고 제대로 문서작업을 마칠 수나 있으려나’하고 생각할 정도로 업무협조전 한 장에 족히 한 두시간은 걸려야 했다. 한 번 작성한 문서는 과장, 부장, 실장, 사업부장 등의 결제 라인을 통해 올라가다가 내용을 정정해 다시 작성하라고 하는 지시가 떨어지면 360KB 용량의 디스켓에 저장된 원본 파일을 다시 읽어들여 수정하곤 했다.

그 당시 디스켓은 왜 그리도 데이터가 자주 깨지는지,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냥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해 손으로 문서를 작성하면 이삼십 분이면 족히 끝낼 수 있었을 터이지만, 회사의 방침은 확고했다.

‘컴퓨터로 작성하지 않은 문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업무 전산화를 추구한다는 목표 아래 시행된 이상한 정책이었다.

오래 전부터 사무실에서의 업무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Paperless Office의 꿈을 꿔왔다. 모든 문서 작업은 컴퓨터에서 이뤄지고 결제 라인까지 컴퓨터를 통해 해결이 되며, 자료의 열람과 보관도 모두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나 백업 장치에 저장돼 일일이 두꺼운 장부나 문서철을 쌓아두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중 일부는 실현됐다. E-mail과 전자결제 시스템은 오늘날의 사무실에서 그 Paperless Office의 꿈을 부분적이나마 구현해 주고 있다. 각종 자료들을 보관할 때도 광파일링 시스템 등을 통해 두꺼운 파일철을 상당히 줄이고 있는 상태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우리는 진정 Paperless Office로 가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에는 종이로 된 문서를 만드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버려질 종이가 너무 아깝기도 하지만 뭔가 문서철을 만들어 책꽂이에 잔뜩 올려놓거나 프린트된 종이를 주변에 놓아두는 것이 번잡하기도 하다. 특히 그런 것들을 일일이 손으로 정리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E-mail은 아웃룩의 로컬 폴더에서 주제별로 분리돼 저장한다. 메일에 첨부된 큰 파일은 따로 작업 폴더에 저장해 메일 자체의 사이즈는 최소화시킨다. 또한 업무와 관련된 각종 문서들도 서브 폴더를 세분화해 저장하고, 각 폴더마다 내용을 쉽게 찾기 위해 파일명과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인덱스 문서를 만들어 정리한다.

더군다나 회사로 오는 신문은 광고를 위해 주요일간지 하나만 구독하고, 나머지 내용은 모두 인터넷을 통해 본다.

이런 식으로만 모든 일이 돌아간다면 이상적인 Paperless Office는 안될지언정 꽤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사 사무실에서의 종이 소비는 나날이 더욱 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새하얗게 표백된 A4 규격의 용지 박스가 여러 개 쌓이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다 소진돼 또 주문을 해야 한다. 복사기와 레이저 프린터는 쉴새 없이 돌아가면서 검은색 토너 가루가 그려낸 글과 그림이 찍힌 출력물을 뱉어낸다.

출력물의 내용을 보면 웹브라우저에서 방금 보고있던 일단의 신문 기사 내용일 때도 있고, 다운로드받은 PDF 형식의 문서일 때도 있다. 혹은 사용설명서이거나 개발중인 프로그램의 소스코드일 때도 있다.

근원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결국 이 종이들이 가는 목적지는 대체로 일관성이 있다. 쓰레기통이다. 모니터 화면의 프린트 버튼만 누르면 10장이고 100장이고 필요한 만큼 인쇄해 주는 프린터는 편리한 도구 역할을 하다가도 대용량 종이 소모기로 변신하기도 한다.

일반 가정에서도 PC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프린터도 함께 필수용품화됐고, 종이 소비가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신문이나 잡지의 구독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인터넷 신문 따로, 종이 신문 따로이다.

인터넷 신문을 보면서도 이것저것 프린트를 해댄다. 아무래도 모니터로 보는 것과 종이에 인쇄된 내용을 보는 것은 서로 차이가 크기 때문인가 보다.

복사기도 이제 수십 장짜리 원본을 올려놓고 버튼만 누르면 손 댈 필요가 없이 모두 복사해주는 편리한 자동급지 기능 덕분에 어지간한 자료는 흔히들 복사본을 만들곤 한다. 그 복사물 가운데 절대량의 최종 목적지 또한 쓰레기통이다.

현실은 이처럼 되어가고 있지만, Paperless Office는 잊혀져서는 안 될 이상향이다. 제지회사에게는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자연보호를 위해 그리고 자원절약을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10년 혹은 20년 전에 사람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신념이다.

하지만 컴퓨터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인터넷이 전국을 연결해주면서, 현실은 그와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Paperless Office라는 표현 자체도 이제 눈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것이 돼버렸다.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개인 차원에서라도 이 이상적인 정신을 되새겨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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