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에서의 상념

By | 2000-12-17

지난 주 8일 금요일 밤 필자는 한국에서 회사 창문을 통해 테헤란로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일주일 뒤인 오늘의 비슷한 시간에 창 밖의 광경은 미국 실리콘 밸리로 바뀌어 있다.

일요일만 빼고는 밤 12시가 가까워도 차들이 도로를 여전히 매우는 테헤란로와는 달리, 여기서는 밤이 깊어 가면서 오가는 차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필자는 지난 98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실리콘 밸리 한 가운데인 서니베일(Sunnyvale) 시에서 살았고, 그 이후로도 수시로 출장을 다니러 왔었기 때문에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제 2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전과 같진 않았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교통체증이었나보다. 실리콘 밸리를 관통하는 혈류라 할 수 있는 101번 고속도로의 정체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덕분에 어제 밤 아침 9시에 IBM 연구소에서 갖기로 한 미팅에 30분씩이나 늦어버렸다.

이것도 규정 속도인 65마일을 넘는 과속과 빈번한 차선 변경을 해서 그나마 30분 정도만 늦은 것이지, 예전처럼 비교적 모범스럽게(?) 차를 운전했다며 아마 훨씬 더 늦어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돌아올 때에 다른 도로로 우회해 봤지만 그것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여기서 테헤란로의 교통체증을 생각했다. 그렇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이곳의 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부부와 점심을 함께 했다. 필자의 첫 직장이었던 삼성전자 입사동기인 그는 약 2년 전에 본인의 웹페이지에 올린 자신의 이력서를 본 미국의 한 회사에 와 연결이 된 후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입사 1년도 되지 않아 더 많은 연봉과 탄탄한 직장을 찾아 다른 회사로 옮겼고 영주권까지 신청했다고 한다. 이제 집을 사려고 몇 달 전부터 시도하고 있다는데 아직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년 전에 한국으로 이사할 때만 해도 50만불 정도면 일반적인 집을 살 수 있었는데 요즘은 어림도 없다고 한다. 그 친구 역시 65만불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좀 괜찮다 싶은 집은 거의 100만불에 육박한다고 하니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비벌리힐즈의 저택 가격은 이곳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여기서 또 테헤란 밸리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버린 사무실 임대료를 생각했다. 비록 최근에 경기 침체와 닷컴 기업의 몰락과 함께 그 기세가 진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는 후배를 저녁 때 만났다. 요즘 들어 한국 전자 전산 엔지니어들의 상당 수가 이곳으로 취업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아닌 미국의 대기업 혹은 벤처기업 쪽으로 오는 게 대부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창 붐을 이뤘던 한국 벤처의 실리콘 밸리 진출은 한풀 꺾여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 경제 상황과 정치 현실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미국 취업 희망 인구가 IMF 때보다 더 많아진 데다가 올해부터 하이테크 취업비자인 H-1B 비자의 발급한도가 20만명으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갈 수 있게 됐다.

요즘 테헤란로가 비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비어간다고 하기보다는 벤처회사가 아닌 다른 업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외국업체들은 새로 지은 아셈빌딩으로 몰려들면서 그 위세를 과시하고 있는데, 벤처회사들은 테헤란로의 한적한 곳에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오늘이다.

그래도 테헤란로는 차들로 계속 붐비고 있고 나날이 체증이 더 심해지고 있다. 사무실의 공실율은 그리 낮아지고 있지만도 않다. 그런데 벤처회사는 주위에서 계속 줄어들고만 있다.

엔지니어들이 미국에 진출한다고 하면 그것은 반길 만한 일일까? 그들이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그곳에서 갈고 닦고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들은 돌아올까? 돌아온다면 언제쯤일까?

테헤란로를 순환하는 고가도로인지, 뭔지를 2010년까지 만든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던데, 과연 그때쯤 되어서 테헤란로에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게 될까…. 자꾸만 머리 속에서 울려오는 의문이 그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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